서로 다른 두 저자의 불멸의 이중주, 요한복음-요한계시록

지난해 5월 <유레카-익투스 요한복음>(쿰란출판사)라는 역작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던 박호용 교수가 이번에는 <요한복음에 비추어 본 요한계시록>(박호용, 쿰란출판사)을 출간하며 다시 한 번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박호용 교수는 이미 저술한 예수학 시리즈(창세기, 출애굽기, 에스겔, 요한복음 주석)의 완결판적 성격을 갖는 예수학 시리즈 제5권 <<요한복음에 비추어 본 요한계시록>>에서 그 의미를 세 가지로 밝히고 있다.

첫째, 성경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구약학과 신약학)를 지양하는 <통전신학>이다. 구약학 교수인 박 교수가 구약을 넘어 ‘예수학’이라는 이름으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저술한 까닭은 필자가 평생의 사명으로 추구하는 신구약성경은 두 권의 책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한 권의 책(요 5:39)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함에서이다. 신구약성경을 하나로 보아야 해석의 빗나감이 없고, 성경이 갖고 있는 진정한 힘(파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위기는 신구약성경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시작하여, 신학교와 교회의 분리, 교회와 사회의 분리, 신앙과 삶의 분리에 있다. 따라서 통전적 사고에 기초한 신구약성경의 통전신학(예수학)이야말로 ‘성서신학’의 출발점이고, 위기 극복의 진정한 열쇠가 여기서부터 비롯됨을 말하고 싶었다.

둘째, 신약성경 해석에 있어서의 ‘삶의 뿌리’의 중요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뿌리’란 전문 용어로 ‘전승 또는 전통’(tradition)을 말한다. 종래의 신약성경 해석은 신약성경이 기본적으로 주후 1세기의 작품이기에, 신약성경을 해석할 때 당시의 공동체(가령, 요한공동체, 베드로 공동체, 바울 공동체 등)로부터 시작하고자 했다. 그런데 저자는 비록 주후 1세기에 속하지만 그 사람의 뿌리는 짧게는 500년, 길게는 1천년 동안 내려오는 이스라엘 역사의 기나긴 두 전통 속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왕국 이스라엘-갈릴리 전통’과 ‘남왕국 유다-예루살렘 전통’이 그것이다. 이 두 전통 중에 어느 전통(전승)에 속하는 것을 고려해야만 신약 문서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인 준거점이 된다. 즉 두 문서는 전승이 전혀 다르다. 여기서 모든 차이(저자, 숫자, 문체, 구조, 신구약 사용 등)가 비롯된다. 즉 요한복음은 북왕국 갈릴리 어부 출신인 ‘사도 요한’의 작품이고, 요한계시록은 남왕국 예루살렘 출신의 대학자인 ‘묵시적 예언자 요한’의 작품이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 ‘하늘의 별’과 ‘땅의 성전’과 ‘땅 아래의 바다’를 살펴보자.

먼저, 하늘의 ‘별’에 대한 시각이다. 남왕국 유다의 대표적 상징은 ‘다윗의 별’이다. 그래서 남왕국 전통인 요한계시록은 별 어휘를 정확히 14회 사용하고 있다. 숫자 14는 ‘다윗’의 히브리어 세 글자의 수가(數價)이다(4+6+4=דוד). 이는 요한계시록이 유다 지파와 다윗(계 5:5; 22:16)을 강조하는 남왕국 전통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반면에 북왕국인 기본적으로 남왕국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싫어하기에 북왕국 전통인 요한복음에는 별 어휘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땅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시각이다. 남왕국 전통인 요한계시록은 신앙과 삶의 핵심 상징인 성전에 대해 기본적으로 긍정적 시각으로 갖고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된 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이면서 새 다윗의 나라로서의 ‘새 예루살렘’(계 21:2)에 대한 동경을 말하고 있다. 반면에 북왕국 전통의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새 성전이기에 성전은 ‘헐어버려야 할 대상’(요 2:19)이며, 진정한 예배는 장소가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데 있음(요 4:24)을 말하고 있다.

끝으로, 땅 아래 ‘바다’에 대한 시각이다. 북왕국 전통인 요한복음은 ‘갈릴리’와 ‘바다’와 ‘물고기’(익투스)를 엄청나게 중요한 어휘로 사용하고 있다. 갈릴리 어부 출신인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그의 고향이요, 바다는 그의 삶의 터전이며, 갈릴리 해변은 그가 예수를 만나 제자가 되기로 결단했던 첫사랑의 날카로운 추억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요한복음의 구조를 5중하강구조라는 ‘갈릴리 지향적 복음서’로 그려놓았고, 또한 익투스(물고기)에 요한복음의 저작 목적(요 20:31) 및 ‘큰 물고기 153’(요 21:11)에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놓고 있다. 반면에 요한계시록은 갈릴리 어휘나 물고기 어휘가 전혀 나타나지 않을뿐더러, 바다는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혼돈의 세력’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바다에서 용이 올라오고(계 13:1), 바다 위에 음녀가 앉아 있고(계 17:1), 바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없어져야 할 대상(계 21:1)으로 그리고 있다.

더욱이 양서의 결정적의 차이는 기독론의 차이, 즉 요한계시록은 남왕국 전통(마태와 누가)인 유다 지파-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로서의 ‘양자 기독론’을 말하는 반면, 북왕국 전통인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뿌리를 땅에 속한, 즉 지연(유다 지파)-혈연(데윗의 후손)에 속한 것을 배제하고, 하늘로부터 오신(선재하신), 즉 성육신하신 분(‘성육신 기독론’)으로 그리고 있다. 이는 신학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양서의 저자(전승)가 다르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셋째, 둘이 연합하여 이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요한복음의 저자와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달라도 너무도 달랐던 두 사람이다. 갈릴리 어부 출신인 사도 요한은 기본적으로 ‘경험의 사람’이고 학자가 아니다. 그는 예수와의 만남이라는 인생의 결정적 사건을 경험함으로 요한복음이라는 불멸의 작품을 남겼다. 반면에 묵시적 예언자(계시록에는 ‘제자’ 어휘가 전혀 나오지 않음) 요한은 기본적으로 ‘학문의 사람’으로, 구약성경은 물론이거니와 바울전승과 공관복음 전승 및 신구약중간사 시대의 산물인 묵시전승까지 섭렵한 대학자이다. 요한계시록은 한 마디로 대학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책이다. 결국 하나님의 역사 경륜은 북왕국 전승을 대표하는 요한복음과 남왕국 전승을 대표하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새 모세의 나라’(북왕국)와 ‘새 다윗의 나라’(남왕국)가 연합된 그리스도 예수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완성을 이룩하신 것이다. 이는 일찍이 예언자 에스겔이 한 막대기에는 북에브라임 족속이라 쓰고 또 하나의 막대기에는 남유다 족속이라고 써서 이 둘이 연합하여 네 손에서 하나(통일 이스라엘)가 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겔 37:15-23). 즉 양서는 한사람이 두 곡을 연이어 부른 독주가 아니라 두 사람이 연합하여 부른 ‘불멸의 이중주’라고 말할 수 있다. 양서는 두 사람의 은사(전승)의 다름을 통해 이룩한 불멸의 업적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임을 말하고 싶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