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몇 달 동안 작은 절에서 공부한 때가 있었다. 늦게까지 책 읽다가 잠들면 새벽 4시도 전에 기거하던 요사채 앞에 어김없이 목탁이 울려 잠을 깰 수 밖에 없었다. 이른바 도량제(道場祭). 도량제는 새벽 예불 전에 절 마당의 부정한 기운을 내몰기 위해 절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염불을 하는 일인 것이다.
교회는 기독교의 도량(道場)이다. 길(道)이요 진리되신 예수그리스도가 머리되신 자리(場)가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란 도량도 끊임없이 부정한 기운의 위협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데, 이른바 사이비와 이단의 위협과 유혹이 그것이다.
젊은시절 자주 데이트하던 덕소 주변 한강변, 1970년대 그곳에는 박태선의 신앙촌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그곳은 고급 아파트촌으로 변모하여 신앙촌의 흔적은 폐가가 된듯한 작은 천부교 예배당 외에는 없다.
수많은 교인들의 전재산을 헌납받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일구어온 신앙촌 재산이 박태선의 아들들의 입으로 다 털려 들어간 것이다. 천부교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요 물신(物神)임을 드러내기까지 50년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얼마전 인터콥의 상주 열방센터에 방역담당 공무원이 방문하여 출입을 놓고 열방센터 문지기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공중파 뉴스에 보도된 적이 있다. “여기는 사유재산이니 영장 가지고 오시오! 헌법상 권리를 침해하지 마시오!” 문지기의 악다구니가 어처구니가 없어 보인다. 열방을 선교하겠다는 도량(道場)을 “사유재산”이라니..... 만일 그렇다면 덕소의 신앙촌보다도 더 빠른 시간에 열방센터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 아닌지 몹시 염려가 된다.
열방센터와 신앙촌, 인터콥과 천부교는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종말론. 인터콥은 “임박한 종말론”에, 천부교는 “실현된 종말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둘 다 급진적인 종말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급진적 종말론”이 가져온 급진적 신앙양태-인터콥은 “선교”라는 신앙의 “극단적 외연화(外延化)”를, 천부교는 “집단생활”이란 “극단의 내면화(內面化)”가 그것이다. 극과 극은 통하듯이 건강한 사회의식의 결여가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다.
셋째, 기성교회와의 관계이다. 인터콥의 설립자도 대형교회의 장로 출신이고, 천부교의 박태선 역시 그 당시 이름난 교회의 장로 출신이다. 이같은 인연을 전면에 내세워 자신들의 입지를 기성교회의 교인들을 통해 넓혀 나간 점이 또한 같다.
코로나19 문제에 대처하는 인터콥의 대응을 많은 그리스도인이 우려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터콥이 천부교와는 다른 길을 걷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지금까지 보여온 인터콥의 행태는 몹시 불안하다. 혹여 50년 후 아니 그 이전이라도 열방센터가 또 다른 사유 재산으로 전락하지 않을지 벌써 염려가 된다. 역사를 모르면 나쁜 역사는 얼마든지 반복되기 때문이다.
젊은 날 낯설었던 도량제를 도맡아 지냈던 초등학교 저학년의 두 동자승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엄동설한에 손등이 얼어 터져 피까지 흘리던 그 거룩한 손길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탈 많은 불교계의 스캔들에도 오늘날까지 불교가 버텨온 힘은 저 순진한 동자승들의 피터진 손등들이 새벽마다 발원(發願)한 도량제에 있으리라.
사순절이다. 장사꾼으로 오염된 예루살렘의 도량을 정화시킨 예수님의 도량제를 기억하며 쫒아가야 할 때이다.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발원하였던 주님의 기도대로 오늘날 교회라는 우리의 도량에 부정한 기운이 엄습하지 않도록 우리의 손등도 피터지게 기도할 때이다.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마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