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제자의 손목 시계가 눈에 띄어 성철 스님이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머뭇거리던 제자가 어는 신도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라 실토하자, 성철 스님이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시계를 바위 위에 놓고 큰 돌로 내리쳐 산산 조각을 내버렸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평상시 제자들에게 신도들로부터는 어떤 선물도 받지 말 것을 엄히 명하였기 때문이다.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기 얼마 전부터 21세기는 “영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견한바 있다. 20세기가 이루어 놓는 물질만능주의 반작용으로, 또 경계가 허물어지는 퓨전(fusion) 시대를 맞이하면서, 영성이야말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이란 기대가 있었기에 그랬으리라. 그래서인지 우리 주변에는 곳곳에서 여러 갈래의 영성운동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몇 가지를 살펴보자.
#1.동두천에서
청계천 빈민과 농촌선교의 경험을 기술한 “새벽을 깨우리로다”의 저자 K목사. 오랜 목회생활을 마치고 여러 해 전 동두천에 수도원을 세우고 새벽마다 영성편지를 쓰고 있다. 목회자와 정치인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던 그의 행보가 영성운동으로 마침표를 찍나 싶더니,정치적 행보는 여전하다. 빈민과 농민을 통해 유명세를 얻은 후 어느 순간 갑자기 “뉴라이트”라는 우파 정치인으로 변신한 그의 모습은 스스로의 모순에 빠진 듯 하여 주변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2. 청량리에서
청량리 588번지라는 선정성을 배경으로 몇 년의 무료 급식을 통해 빠르게 이름을 얻은 C목사. 한동안 목회며 밥퍼운동을 하다가 그 역시 어느 순간 경기도 모처에서 영성 센터를 세우고 사역중이란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 한권과 연예인급의 왕성한 방송활동으로 빠른 시간 안에 유명세를 탄 그는 어찌 보면 큰 행운아(?)이다 - 필자가 아는 어느 캐토릭 수사에 비하면 말이다(그 수사는 C목사보다 오랜기간 영등포역 앞에서 무료급식을 주도하였지만 혹 누가 자신을 알까봐 일체의 인터뷰를 사양한 인물이다).
#3. 망원동에서
“지성과 영성의 만남”이란 책의 대담자로서의 L목사. 목회와 출판으로 큰 이름을 얻더니 어느 순간부터 영성을 이야기한다. 목회를 시작할 때 쯤 “나의 고백”이란 고백록(?)을 출판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목회 데뷔를 알리는 선언서(manifesto)이자 스스로를 대중에게 알리는 브로슈어(brochure)였으리라. 사업중에 신학교를 입학한 그의 DNA속에는 경영마인드가 각인된듯하다. 경영의 목표는 이윤극대화이고, 그것을 위해 홍보가 중요하며, 홍보전략의 핵심은 “차별화”에 있다. 그는 목회 경영의 최우선 전략이 “차별화”에 있음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는 듯 하였고, “나의 고백”은 그의 목회 출발점에서부터 “차별화”를 이루어가는 전략적 도구였으리라 (그는 신학교 시절부터 “차별화”된 학생이었다-150여 명 동기 중 유일하게 자가용으로 등하교를 하였으며, 동급생보다 먼저 교수들과 친근하였고, 1987년 6월 항쟁 때 동맹 휴학을 거부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차별화를 위한 그의 각고의 노력은 “주님의 교회”라는 네이밍(naming)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어처구니없는(?) 작명 - 왜냐하면 “주님”과 “교회”는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 속에는 “기존 교회와의 차별화”의 의도가 깔려 있으며, 이를 통하여 그는 개척 초기부터 많은 교인들의 수평이동이라는 경영성과(?)를 거두었다. “차별화”란 이미지의 창출, 그를 통한 목회적 번영에 익숙한 L목사에게 영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척 궁금하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하긴 힘들 만큼 영성의 세계는 높고 깊으며 또 한없이 넓다. 굳이 나름대로 정의한다면 영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부재(不在, '내가 없어짐으로 실재한다', 즉 예수의 '자기부인')함으로 존재케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 소설가 박완서 님은 어느 책에서 “인간은 부재함으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부재함으로 존재”한다니...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그 단서들을 찾아 볼 수 있으리라. 예컨대 아담과 하와는 한때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부재함으로 존재하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또 주님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는데, 이 또한 인간이 부재함으로 존재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이처럼 참된 영성은 인간을 “부재함으로 존재케” 한다.
영성의 의미를 이같이 이해한다면, 오늘날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영성운동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동두천에서, 청량리에서, 망원동에서 불고있는 “영성의 바람”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생명의 바람”일까? 동두천의 K, 청량리의 C, 망원동의 L, 이분들은 올바른 영성운동을 위해서는 스스로를 먼저 “부재함”으로 몰아가야 한다는 치열함을 보여주고 있는가?
영성은 자신의 부족이나 과오를 합리화하는 면죄부가 아니다. 또 스스로의 신앙을 미화하거나 아름답게 포장하는 포장재료는 더욱 아니다. 영성과잉의 시대를 우리가 경계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4차원의 영성”이 어느 날 “수 십억의 배임죄”로 추락을 하고, “머슴목회의 영성”이 갑자가 “수 십개의 비자금 통장”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이 시대- 영성의 과잉을 염려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들이기도 하다.
반세기 전 가야산에서 어느 날 울려 퍼진 “우지끈”하는 큰 소리! 너럭 바위 위에 산산조각난 명품 시계의 파편들! - 영성이 물성(物性)을 박살낸 바로 그 자리가 진정한 영성의 요람이 아닐까? 영성이 메말라 버린 “영성 과잉의 시대”에 - 모세의 지팡이가 반석을 갈라 물을 터뜨렸듯이 - 우리 주변 곳곳에서 “우지끈” 하며 터져 나오는 참된 영성의 물줄기를 고대해 본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데도 소용이 없다”(요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