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16)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28)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을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욥10:6-7).

펜데믹 시대에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인류의 모습을 우리는 마스크 인간에게서 보게 된다. 코로나 19바이러스가 전염되지 않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 ‘사회적 거리두기’나 여러 방역정책으로 시행되고 있다. 그래도 인간의 실수에서 비롯된 인재가 천재(天災)와 같은 재앙으로 바뀌어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리고 인간을 괴롭게 하고 있다. 욥이 개인적으로 탄식을 외치며 고통을 드러내는 심정이 우리의 심정과 같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나퀘타)하니 내 불평(시히)을 토로하고 내 마음(나프쉬)이 괴로운 대로(베마르) 말하리라”(욥10:1). 오늘날 코로나 19 전염병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불평과 피곤함을 이를 수 있다. 2년이나 이 전염병이 사람의 일상을 바꾸어 놓고 생존의 위협을 하며 생계의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욥처럼 자신의 영혼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토로해야 그 고통이 조금이라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욥10:2-3).

욥은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이유 있는 고난이니 죄를 회개하라고 한다. 새로운 변론자, 욥의 친구인 빌닷이 두 번째 변론을 흑백논리식 도덕주의 입장으로 말한다. 유서 깊은 전통의 말을 인용하여 빌닷은 자신의 말의 권위를 세우려 한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욥8:8-9). 욥기 10장은 빌닷에 대한 답변을 하는 중에(9장) 욥은 인과응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권아래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며 하나님께 답변한다.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욥10:8). 이 전염병의 위협은 이제 인간들을 멸하시려 하는 심판의 칼과 같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욥10:9,10,12,13). 나를 조성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시며 인류를 지으신 분이 이제 인류를 흩으시며 심판하시는 모습이며, 또 이는 오늘의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욥을 공격하는 것 같이 인류를 벌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머리를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욥10:16). 오늘의 고통과 고난 속에서 구원을 간구하는 욥은 펜데믹 시대의 인류와 인간을 대변하는 외침이다.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욥10:21-22).

이러한 시대에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들이 있다. 바로 그 빛의 사자(使者)가 선교사이다. 리드(이덕, 1849-1915)는 남감리교회가 파송한 첫 선교사였다. 1878년 중국 선교사로 갔다가 1895년 10.13일 헨드릭스 감독과 함께 한국에 들어와 고종황제를 만난 후에 더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고 다음해에 가족들과 함께 귀국하여 1901년까지 활동한다.

리드는 윤치호와 더불어 고양읍교회와 광희문교회, 남송현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는 조선 남감리교회 창설자로서 서울, 고양, 송도, 원산, 금화 등지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광희문교회(기감)의 리드하우스 기공식, 해외 선교사들의 게스트하우스
광희문교회(기감)의 리드하우스 기공식, 해외 선교사들의 게스트하우스

송도에 한영서원과 남성병원을 설립하였다. 웅변가요 교회 대정치가요 실행가인 리드는 1915년 켄터키 주에서 별세하였지만 자신이 세운 선교지를 죽을 때까지 섬기기를 멈추지 않았다(저다인 선교사). 그 후에도 아들 리드(이위만)를 남성병원 담당 의료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 아들 리드가 게일과 언더우드, 밀러와 벙커와 스톡스, 갬블과 더불어 백만인 구령운동의 중심에서 일하였다. 오늘날도 이 빛의 사자들에 의해 팬데믹은 종식 될 것이다. 복음과 빛을 전하러 주의 종들이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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