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다문화적인 역동성을 갖고 있어”

한국인이라면 아마도 단군할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릴 때는 동화책 속에서, 학령기 때는 교과서 속에서 우리는 단군신화를 보고 들으며 한국은 지구상에 몇 안 되는 단일민족국가라고 배워왔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랑스러워한다. 여기에 우리의 단일화된 언어도 한몫을 했다. 이 신화는 한국 역사 속에서 숱한 외침과 강대국들에 대항할 때마다 민족의 결집된 힘으로 나타났고 우리의 한국어는 한민족 간의 강력한 통합의 상징적 중심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외국인에게 상당히 열린 국가였다. 그 사례는 국내외 많은 문헌이나 연구자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은 민족 형성 초기부터 전세계의 문화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고대의 세 갈래 문화교류 통로는 현 우리의 문화 기원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출처: https://blog.naver.com/tasmanic/222488364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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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문화는 역사적으로 시기를 달리하면서 다양한 외국인과 함께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가야국의 김수로 왕과 혼인하여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를 출현시켰고 삼국시대 때는 불교적 문화를 공유하면서도 인종이나 영토의 개념에 구속되지 않았으며 고려 초에는 중국, 일본, 말갈, 거란 등지에서 온 17여만 명의 외국인이 전체 인구의 8.5%를 이루었다고 한다. 고려 광종 때 과거제를 추천한 중국인 쌍기의 귀화, 화산 이씨의 조상이 된 베트남 왕자 이용상과 정선 이씨의 조상이 된 그의 아들, 회교도 출신으로 귀화하여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된 장순룡, 경주 설씨의 시조가 된 위구르 출신의 설장수, 원나라 화약제조법을 전수해준 이원 등 고려의 개방정책과 적극적인 대외활동은 다양한 외국인들을 불러들였다. 몽고 침략기에는 원나라 공주와 고려 왕자들 간의 혼인뿐 아니라 상당수의 몽고인이 귀화하는 등 엄연한 다문화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에는 유난히 귀화인이 많았다. 특히 조선은 여진족의 귀화를 허용하여 대부분 김씨 성을 하사하였으며 여진인 이지란은 청해 이씨의 시조가 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일본의 장수였던 김충선, 네덜란드인 박연(벨테브레) 등 많은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광해군 때는 조선의 어디든 귀화인이 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1882년 임오군란 이후로는 청나라 군사들이 조선에 정주하면서 지금의 화교를 형성하였고 미 군정기 때 미군과 한국인 여성과의 혼인으로 이루어진 다문화가족과 이후 다양한 이주민의 유입과 정착으로 생겨난 다문화가족의 증가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이들 외에도 수많은 외국인이 이민 및 귀화로 이 땅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민족이라는 경계에 구애됨이 없이 매우 유연하고 열려있는 다문화적인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다문화적인 역동성을 갖고 있어

이미 여러 연구집단에서 발표한 결과 중에는 한민족은 북방 기마 민족과 남방 농경민족이 약 6:4 비율로 혼합된 복합 민족으로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단일민족이라고 단정짓기가 어렵다고 한다. 게다가 한국인 성씨 중 절반 가량이 중국 등 타 지역에서 귀화한 성씨이기도 하다.

문산 다민족 플랫폼
문산 다민족 플랫폼

그러면 민족이라는 개념과 단일민족주의적 정서는 언제부터 어떻게 강조되었을까.

민족이라는 단어는 잦은 외침과 그 극복과정에서 정신적인 단결을 위해 사용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국민의 내재적 에너지 결집을 위해 단일민족주의적 정서를 강조하며 그 결집된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 회복하고자 하였다. 즉 민족은 곧 국가이고 국민이며 필사적으로 지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민족이라는 용어는 1905년에서야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단일민족이라는 용어는 1948년 손진태의 국사대요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해방 이후 외세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의 결집 전략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단일민족 신화는 한민족의 생존과 직결되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민족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단일민족의 실체와 상관없이 그것이 필요한 시대가 있었던 것처럼 다문화사회로 접어든 이제는 민족에 대한 또 다른 새로운 인식으로 외국인과 외국문화에 대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접근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단일민족 신화는

한민족의 생존과 직결되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

국제결혼으로 새로운 한국인이 된 다문화가족들, 우리의 인력 수급을 위해 이 땅을 밟은 외국인 근로자들, 자유를 찾아 우리에게 온 북한이탈주민들, 한국을 배우고 알기 위해 온 유학생들, 여러 가지 이유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 머물고 있는 난민들,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이들을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차별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그들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며 하나님의 시선을 담은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안성시 초등학교 다문화 이해 교육
안성시 초등학교 다문화 이해 교육

건강하고 진정한 다문화사회의 정착은 순혈주의, 단일민족주의를 넘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문화적 다양성을 이해하며 공감하고 수용할 때 더욱 앞당겨질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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