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와 함께한 이민의 역사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의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

어느 유명 트로트 가수의 보릿고개노래 가사의 일부이다. 말로만 들어오던 힘든 보릿고개 시절의 굶주린 상황을 실감하게 해 준다.

예로부터 맥령(麥嶺)이라 부르던 보릿고개는 봄부터 여름철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춘궁기로 농가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말한다.

일제강점기 때의 온갖 수탈과 광복 후 6.25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이 시기 연례행사처럼 찾아온 보릿고개는 위 노랫말처럼 배고픔 그 자체였다.

쌀이 없어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죽을 만들어 먹거나 봄 한철엔 쑥을 뜯어 식용으로 만들어 끼니를 잇기도 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흙을 밀가루처럼 빚어 먹었다고 한다. (사진1)

그러한 보릿고개와 함께한 해외이주 역사의 세 번째 시기인 1945년부터 1962(정부가 이민정책을 처음으로 수립한 해)에는 8.15 광복과 6.25 한국전쟁 등 복잡한 사회 혼란 속에서 특수한 해외이주가 이어졌다.

해방 당시 재외한인은 중국, 일본, 구소련, 대만, 동남아, 중부 태평양, 미국 등 세계 각처에 약 500만 명이 산재해 있었으며 그것은 당시 우리 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광복 후 그중 절반에 해당하는 220~250여만 명이 귀환하고 나머지는 해외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여러 가지 국내외 사정으로 돌아오지 못한 많은 미귀환 동포가 발생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230여만 명의 한인 중 약 8~90만 명만이 국내로 돌아오고 140여만 명은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의 정책에 따라 현지에 정착해야 했다. 일본에 머물던 한인 200여만 명 중에도 140여만 명이 귀국하고 나머지는 조국의 땅을 밟을 수가 없었다. 또한 역지사지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소련에서는 20여만 명의 한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 후 거주이전의 자유가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5만여 명의 사할린 한인은 구소련의 강제억류정책으로 한국행이 원천 봉쇄되었다.

이렇게 전후 새롭게 형성된 국제정세에 따라 한인들은 남북분단과 냉전체제 라는 현실 속에서 해당 국가의 이해에 따라 억류되거나 예속되어야 했다.

이런 가운데 어렵게 모국으로 돌아온 귀환자 중 일부는 한국의 극심한 사회 혼란으로 오히려 만주나 일본으로의 재이주를 결심하게 된다.

당시 상황을 보면,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던 만주 귀환자의 경우, 귀환 후 한국에서 경작지를 확보할 수 없어 생도(生道)가 막막해졌고 일본 귀환자의 경우엔 19464일화예금령으로 인해 그들이 반입한 일본화폐가 휴지 조각이 되어 극심한 생활난으로 생계형 밀항이 급증하였다. 일본 밀항자에 대한 기록은 일본 법무성과 후생성에서 작성한 밀항자 보고서나 나가사키현의 오무라 수용소(적발된 밀항자 수용소) 이감 자료와 조총련과 민단이 연합국총사령부에 밀항자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는 진정서 등에 자세히 남아있다.

광복 직후 한반도 안팎에서 벌어진 다양한 이동 가운데 이같은 한인 귀환자의 재이주 현상은 모국에서의 예상치 못한 극도의 생활난과 모국사회의 냉대가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재이주의 이면에는 오랜 식민 지배와 갑작스런 제국의 붕괴와 후유증, 점령 통치로 인해 한국사회의 요구를 관철할 수 없었던 국가 부재, 그리고 미군정의 부적절한 정책을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던 한국 사회 내부의 정치력 부재 등 복합적인 요인이 응집되어 작용했음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이 시기에는 6.25 한국전쟁을 전후로 발생한 전쟁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 학생 등이 입양이나 가족 재회, 유학 등의 목적으로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광복 이후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에는 약 4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다수의 주한미군이 한국 여성과 결혼했는데 당시 한국 사회는 국제결혼에 대한 편견과 냉대가 심하였고 이에 따라 미군의 배우자였던 6000명가량의 한국 여성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또한 6.25 전쟁 후 한국에는 수많은 이산가족뿐 아니라 수십만 명의 과부와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가 생겨났다.

당시 전쟁고아들의 한국 내 가정으로의 입양은 심각한 경제적 빈곤과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관으로 인해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그 대안이 해외로의 입양이었다. 빈곤에 처한 많은 전쟁고아 중 혼혈아동은 한국 정부와 민간 입양 주선 기관에 의해 해외입양 대상 아동의 일순위가 되어 정전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약 8000명의 아이가 미국인의 가정에 입양되었다. 이 시기의 입양은 당시 주둔했던 미군들과 그 가족, 그리고 미국 내 민간인에 의한 인도적인 차원뿐 아니라 냉전체제 속에서 공산주의 봉쇄라는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국제결혼 여성과 입양인들은 오랫동안 미국 주류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미국 전역에 흩어져 외롭고 고립적인 이민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 해외입양인연대(GOAL, Global Overseas Adoptees’) 미 아내협회(Korean American Wives Association) 같은 단체를 통해 교류와 연대를 강화하면서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시기 또 하나의 이주 흐름은 유학생과 연구원, 의사, 간호사 등이다.

당시 6000명가량의 학생이 미국으로 건너가 상당수가 학위를 취득하거나 학업과 훈련을 마친 후 이주민으로 그곳에 정착하여 이후 연쇄이민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미국이 1965년 이민법 개정으로 문호를 개방했을 때 이들은 국제결혼 여성들과 함께 가족을 초청할 수 있는 초청이민의 열린문이 되어 주었다.

어렵고 고달팠던 시절의 대명사, 보릿고개!

살아가면서 우리도 인생의 수많은 보릿고개를 지날 때가 있음을 본다. 허리를 펴지 못하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인생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힘겨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간다. 그런데 그렇게 숨죽이며 한숨 쉬던 어느 날, 놀랍게도 그 골짜기 마디마디마다 샘물이 솟아나온다!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고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눈물 골짜기에서 샘물을 마시고 적시며 감사함으로 그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이주민 역시 또 다른 인생의 보릿고개를 숨겹게 견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소중한 인생의 보릿고개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이 넘쳐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복음 1418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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