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갈 수 있는 곳, 그곳에는 한국인이 있다!

얼마 전 애플tv플러스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파친코는 뉴욕에 정착한 한국계 1.5세대인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를 극화한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4대에 걸친 이민 가족의 대 서사로 한국 역사가 주된 배경을 이루며 허구와 사실이 공존하고 있지만 한국인의 파란만장했던 해외이주 역사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살아내기 위해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의 비탄한 삶의 역사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쳤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인 이 외침은 어쩌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어떤 불합리와 참혹함에도 굴하지 않고 인내한 우리 재외동포의 처절한 삶의 몸부림을 표상하는 것이리라.

파친코의 시작이 바로, 재외동포 해외이주 역사의 두 번째 시기인 1910년부터 1945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이 시기에는 일본에 의해 토지와 생산수단을 수탈당한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주와 간도, 일본 등지로 이주를 하였다. 그리고 목적을 달리한 정치적 난민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과 러시아, 미국 등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당시 도일(渡日)한 한인의 이주를 살펴보면, 1차 세계대전(1914~1918) 중 일본의 경제호황으로 많은 한국인 노동자가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가족 단위로 이주를 하면서 한인의 정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오사카를 중심으로 일본 전역에 한인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후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만주국 건설을 계기로 만주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한인을 대규모로 강제 집단이주를 시켰다. 이로 인해 1945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200만에 가까운 한인이 만주지역에 거주하였다. 그들 중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온 사람도 많았지만 일부는 현지에 남아 지금까지 조선족 자치구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 때는 수많은 한인이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광산이나 전쟁터로 징집, 징용되거나 정신대 등으로 끌려가 이 당시 강제이주를 한 한인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출처: 우리 문화 신문
출처: 우리 문화 신문

한편 또한 이 시기에 토지를 잃은 농민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과 연해주와 사할린으로 이주하여 한인의 인구가 증가하였다. 특히 연해주와 중국의 상하이는 독립운동의 기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많은 한인이 거주하였다.

하지만 1937년 구 소련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사할린의 한인과 연해주의 고려인 17여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1920년 봉오동전투를 이끈 홍범도 장군 등 9만여 명의 고려인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6500km나 되는 중앙아시아까지 한 달이 넘도록 짐짝처럼 화물열차에 실려 가던 중 많은 사람이 추위와 폐렴, 영양실조, 열차 탈선 사고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고려인의 강제이주는 당시 스탈린의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척박한 불모지인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그들은 그 황무지를 개간하여 강제 이주시 가져갔던 볍씨로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을 2도나 상승시키는 기적을 이루어 내었다. “사람이 갈 수 있는 곳, 그곳에는 한인이 있다!”는 불문율과도 같은 공식을 만들어낸 그 고려인의 후손이 현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카레예츠(카레이스키)이다.

출처: EKW 이코리아월드
출처: EKW 이코리아월드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 이듬해인 1938,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사할린에 남아있던 한인들을 남사할린으로 이주시켜 30여 개의 탄광과 벌목장, 비행장, 도로, 철도 등 건설현장에서 혹독한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때 강제 징용된 한인 수는 약 6~15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19458월 일본이 패전하고 소련이 사할린을 점령하면서 사할린에 남게 된 이들은 무국적자가 되거나 생존 차원에서 소련 국적을 취득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이 시기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유학생이나 정치망명자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간 한인이 많았다.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김마리아 등이 이때 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러나 1924년 미국은 아시아인의 미국이민을 불허하는 이민법을 제정하여 아시아인의 합법적인 이주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그래서 1945년 광복 때까지 하와이에 6500여 명, 미국 본토에 3000명가량이 미국 주류사회와는 고립된 상태로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재미 한인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지금까지 살펴본 해외이주 두 번째 시기는 그 이주의 배경 속에 일말의 강제라는 뿌리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나라 잃은 설움과 비참함의 역사가 본토를 떠나 갈 바를 모르는 곳으로 그들을 밀어낸 셈이다. 이 시기의 이주를 보면서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적 삶과 홀로코스트의 비명이 오버랩 되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하지만 모든 인류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잔잔히 녹아있음을 기억한다. 그래서 이 두 번째 시기의 특별한 이주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외할 수 있는 유익한 기회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날의 우리의 후손이 다양한 문화 속에서 역사를 이어가듯 오늘 이 땅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주민의 삶 또한 우리의 역사이다.

세계 각처에서 이주하여 이곳에 뿌리내리며 오늘도 새로운 이주의 역사를 쓰고 있는 이주민에게도 하나님의 동일한 위로와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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