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신명기24:21~22)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자의든 타의든 삶의 터전을 옮겨가는 이주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성경에도 다양한 인물과 집단이 오랜 세월 동안 동서남북의 지경을 넘나들며 타문화와 혼재하여 살았던 이주의 발자취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밧모섬으로 유배 간 사도 요한에 이르기까지 성경 속의 수많은 인물은 나름 각양각색의 이주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가히 인간의 역사를 이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 직하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출처:Global Internet Mission)
이스라엘의 출애굽(출처:Global Internet Mission)
The Flight of the Prisoners (1896) by James Tissot; the exile of the Jews from Canaan to Babylon
The Flight of the Prisoners (1896) by James Tissot; the exile of the Jews from Canaan to Babylon

우리나라 또한 국내 지역 간 이동을 뜻하는 국내 이주뿐 아니라 국경을 초월하는 국제이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민이 한국에서 다문화사회를 이루며 살듯이 우리 재외동포도 타국에서 외국인 근로자, 결혼이민자, 유학생, 전문인력 등 다양한 이주민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국제이주는 이주의 흐름보다 이주의 근본적인 이유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시기별로 재외동포의 해외 이주 역사와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주민으로서 재외동포의 삶과 한국에서 타자(他者)로 살아가는 외국인 이주민의 삶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성숙한 다문화 사회인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먼저,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재외동포란 재외국민과 외국국적 동포 모두를 의미한다. 2021년 외교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현재 재외동포는 약 730여만 명으로(재외국민 250여만 명, 외국국적 동포 약 480만 명) 미국, 중국, 일본, 캐나다, 우즈베키스탄 등 180여 개국에 거주하고 있다.

지금의 재외동포가 형성되기 시작한 첫 번째 시기인 1860년대부터 1910에는 구한말의 사회적 혼란과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과 역병으로 많은 농민과 노동자가 국경을 넘어 중국, 러시아,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하였다.

당시 간도와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대부분 경제유민(流民)으로 입국이 금지되었던 지역에서 농지를 개간하면서 신분상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 지금으로 말하면 미등록 외국인(불법체류자)과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1860년대 간도 지역엔 이미 77,000여 명의 조선인 이주민이 있었으며 대부분은 소작농으로 지주로부터 억울한 일뿐만 아니라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게 일상이었다.

구한말 지도(출처:간도되찾기운동본부)
구한말 지도(출처:간도되찾기운동본부)

사실 불법으로 땅을 개간했어도 토지세를 내고 소유권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언어도 통하지 않고 등록 절차도 잘 몰라 개간한 토지를 고스란히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이나 종의 신세로 전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청의 봉금령 폐지(1881) 이후엔 간도와 만주로의 이주가 더욱 본격화되었는데 만주 지역은 개척할 농경지도 많았고 수렵과 벌목으로 생계유지가 가능하여 1910년 무렵 간도를 비롯한 만주 지역에는 약 20만 명의 조선인이 거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 지역은 19세기 중엽까지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었다. 또한 극동의 오지였던 이곳은 관리가 허술한 틈을 타 1860년대부터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농사와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연해주로 대규모 이주가 지속되었으며 그들은 러시아 영토 내에서 카레예츠(Koreets)라고 불리며 현 외국국적 동포인 고려인의 기원이 되었다.

이후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첫 해외 이민은 1902~1903년에 시작된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주이다.

집조(출처 : 외교부 홈페이지)
집조(출처 : 외교부 홈페이지)

1905년까지 약 7,000명이 넘는 이주자는 유민원(지금의 외교부)이 발급한 집조(, 여권)를 가지고 공식적인 이주를 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독신 남성이었다. 그래서 이들과 결혼하기 위해 사진결혼의 형태로 1,000여 명의 한국 여성이 1924년까지 하와이로 이주하여 이민 가정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당시 하와이는 이민자들이 꿈꾸던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매일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하며 언어도 안 통하는 농장 감독자들의 비인간적인 처우와 부당한 횡포에 늘 시달려야 했다. 또한 사탕수수 농장뿐 아니라 어부나 철도 공사, 개간 사업 등에도 종사하면서 혹독한 인종차별을 경험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교회를 세워 공동체 결속을 다지고 피땀 흘려 번 돈을 독립운동 자금에 보태며 항일 운동을 이어 나갔다. 1908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전명운, 장인환 의사도 당시 이주민 노동자 출신이었다.

 

이 시기 중남미로의 이주는 1905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영화 애니깽의 모티프)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1,033명이 이주한 것이 효시였다. 1905년 대한제국에서 일어난 이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의 노동자 이주는 당시 이민 사기 사건이라고 불릴 만큼 유명하다. 배포된 이주노동자 모집 광고문에는 멕시코는 미국과 같은 부강국가이고 푸른 황금밭에서 떼돈을 벌 수 있는 지상 낙원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계약 만료 후에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달콤하고 현혹되기 쉬운 문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영국 상선 일포드호에 몸을 싣고 제물포항을 떠난 조선인들은 멕시코에 도착하자 모두 농장 노예로 팔려 나갔다. 그들은 에네켄 농장에서 40도가 넘는 무더위와 싸우며 가시에 찔려 가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야 했다. 그 고된 노동과 비인간적 대우를 견디다 못해 탈출을 시도하거나 병으로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이후 이 중 300여 명은 힘든 노동과 경제난을 피해 쿠바로 재 이주하여 현재 그 후손이 쿠바 속 코레아노들이 되었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한국노동자들(출처:경북매일신문)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한국노동자들(출처:경북매일신문)

지금까지 재외동포 형성의 근간이 되는 첫 번째 시기의 국제이주를 살펴 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와 다른 삶을 살아가고 다른 경험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 주류 집단의 억압과 통제는 항상 소수 집단을 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다인종, 다문화사회는 소수자인 외()집단 사람들을 주류인 내()집단과 대등하게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집단인 타자(他者)의 문화와 제도, 관습 등을 그들의 삶의 조건과 관련하여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방증하는 말이리라. 하지만 나의 위치가 아닌, 타인의 자리에서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의 지혜를 발휘한다면 열 길 물속은 몰라도 한 길 사람 속은 이해하고 수용할 줄 아는건강한 다문화사회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예수님은 산 위에서 사랑하는 우리를 향해 외치고 계신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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