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ak Lee:  Azusa Pacfic Univ.  

                 Calvin Thological S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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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번 ( Van Cliburn 1934-2013)은 미소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195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콥스키 피아노 콩쿠르에서 23세 나이에 금메달을 차지하므로 미국인 피아니스트로서 국제적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클래식음악 역사가 짧고 빈약했던 미국인들에게 예술적 자부심은 물론 신선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 뉴스였다.

젊은 나이에 단숨에 미국의 문화대사가 된 그는 1987년 백악관의 초청 공연에서 레이건 대통령 ( Ronald Wilson Reagan 19112004 )과 당시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 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1931) 이 동석한 자리에서 연주를 하므로 냉전시대의 종식을 예고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해리 트루먼( Harry S. Truman 18841972) 부터 버락 오바마 ( Barack Hussein Obama 1961 )까지 모든 대통령을 포함하여 왕족과 많은 국가 원수들을 위해 연주했으며 이념에 관계없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선물하므로 평화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5811월 클라이번의 차이콥스키 콩쿠르 수상을 축하하는 만찬 장에는 클라이번과 그의 어머니 리디아 (Rildia Bee O'Bryan Cliburn )를 포함해서 약 500명의 관중들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국제 피아노교육자연맹( National Guild of Piano Teachers )의 설립자인 앨리슨 박사는 ( Dr. Irl Allison )는 갑자기 깜짝 발표를 한다. 클라이번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명명된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1등상으로 $10,000을 제안하겠다고 발표 한 것이다. 당시 만불이면 지금 10만불보다 더 가치 있던 때였다. 이 아이디어는 모두를 놀라게 했고 즉시 폴트 월츠 (Fort Worth ) 전역의 음악 애호가와 시민 지도자들의 상상력과 열정에 불을 질렀다.

클라이번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텍사스 ( Texas )의 폴트 월츠 ( Fort Worth )는 당시 전형적인 카우타운( Cowtown )으로 알려진 농장지대인데 이곳을 세계적 수준의 국제 피아노 콩쿠르 개최지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61, 조직이 성공적으로 완성되었고 밴 클라이번 재단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어 1962년에 드디어 첫 번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4년에 한번씩 열리는 이 행사는 올해 팬데믹( Pandemic )으로 1년 늦추어 16회째를 202262일 부터 18일까지 TCU ( Texas Christian University )의 밴 클라이번 콘서트홀과 (Van Cliburn Concert Hall)과 바쓰 홀 ( Bass Performance Hall )에서 열렸다.

세계 최고의 18세에서 30세 사이의 피아니스트들이 텍사스 포트워스의 라이브 청중과 천만 명이 넘는 글로벌 온라인 시청자 앞에서 금메달을 놓고 경쟁했는데 상금을 넘어 클라이번 메달을 수상한다는 것은 피아노의 대가로서 세계무대에 설 수 있는 등용문인 셈이다.

이 경쟁을 가름하기 위해 15개국을 대표하는 30명의 국제 예술가가 선정되어 심사를 했으며 이번대회에 무려 388명의 피아니스트가 지원하여 그중 72명의 피아니스트가 선발되었다. 따라서 이미 3월에 TCU에서 심사위원 심사와 라이브 청중 앞에서 25분간의 독주회를 펼쳐 추려진바 있다.

68일부터 12일까지 준결승 라운드에서는 12명의 참가자가 2단계로 경쟁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60분간의 독주회, 두 번째는 유명한 지휘자 니콜라스 맥기건 (Nicholas McGegan)과 폴트월츠 교향학단 ( Fort Worth Symphony Orchestra )의 협연으로 모차르트 협주곡을, 결선은 614일부터 18일까지 역시 명망있는 지휘자이자 심사위원장인 마린 알솝(Marin Alsop 1956)과 함께 2개의 협주곡을 통해 6명의 결선 진출자들이 승부를 겨룬 것이다.

Yunchan Lim Conquers The Cliburn at 18  임윤찬이 18살에 클라이번을 정복했다
Yunchan Lim Conquers The Cliburn at 18 임윤찬이 18살에 클라이번을 정복했다

밴 클라이번 60년 역사상 가장 긴 기립박수는 바로 이 결선 연주에서 터저 나왔다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대한민국의 18세 소년 임윤찬, 그가 클라이번이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연주했던 것과 같은 결선곡 라흐마니노프 3번을 막 끝낸 뒤였다. 아직 여린 미소년의 티를 다 벗지 못한 그였으나 그가 라흐마니노프 ( Sergei Vasilyevich Rachmaninoff 18731943 )를 끝내고 무대에 섯을 때는 마치 망망한 바다에서 휘몰아치는 질풍노도, 산처럼 거대한 파도를 수없이 넘어 결국 자신의 배를 끌고 부두에 정박시킨 선장과도 같은 모습이었으며 그의 얼굴에 빛나는 카리스마는 청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연주회가 아닌 경연장에서 그래서 거의 순수한 감상자이기 보다 전문가이며 비평가들로 가득찬 관중들은 어느새 이 젊은 선장의 배에 함께 승선했으며 연주가 끝났을 때는 마치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듯 참았던 거친 숨을 몰아쉬며 터질 것 같이 북바치는 가슴을 기립박수로 토해내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 3( Piano Concerto No. 3 in D minor, Op. 30 )은 정말 그런 곡이 아닌가? 아무나 쉽게 덤빌 수 없는 사나운 폭풍과 감당할 수 없는 파도를 품고 있는 검푸른 바다 같은 곡, 어떤 말, 어떤 단어, 그 어떤 몸짓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을 날카롭고 비장한 음표로 벗겨내어 전율하게 하는 엑스타시 ( Extacy )를 가진 곡.

그 순간 정말 관중들은 임윤찬이 터뜨린 엑스타시에 붙들려 놓여나지 못하고 있었고 어쩌면 놓여나고 싶지 않아 그 여운을 붙든 채 박수갈채와 신음 같은 함성을 쏱아 내고 있었다무려 8분여의 갈채동안 세 번째 콜링 무대에 지휘자와 함께 나서 인사하므로 박수와 함성을 뒤로한채 퇴장해야 했다.

클라이번 역시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8분 동안 기립 박수를 받은 바 있다. 우승자를 발표할 시간이 되자 심사위원들은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 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18941971 ) 에게 1등상을 미국인에게 줄 수 있는지 여부를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는 그가 최고라면 그에게 상을 주세요! ” 라고 해서 당시 적국의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1등상이 돌아갔던 것이다. 당시 타임지의 표지 기사 는 이를 "러시아를 정복한 텍사스인 ( The Texan Who Conquered Russia )"이라고 명명했다.

그후 64년이 지난 오늘 역대 최연소 금메달리스트는 임윤찬이었지만 은메달은 러시아 안나 제니우셰네(Anna Geniushene, Russia, 31), 동메달은 우크라이나 드미트로 초니(Dmytro Choni, Ukraine, 28)에게 돌아갔다. 공교롭게도 지금 전쟁중인 두나라의 청년들이 Texas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이 콩쿠르에서 클라이번은 우크라이나 국민과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키예프 태생의 2013 Cliburn 금메달리스트 바딤 콜로덴코 ( Vadym Kholodenko )가 토요일 시상식에서 우크라이나 국가를 연주하도록 했다. 사실 6명의 결선 진출자 중 4명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밀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 2명은 러시아, 1명은 침공을 지원한 벨로루시 출신, 1명은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이었다.

이 문제로 러시아의 참가 여부를 결정해야 했던 조직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있어서는 안될 가슴 아픈 일이다. 물론 클라이번은 이 전쟁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고 규탄한다. 그러나 제16회 밴 클라리번 ( Van Cliburn )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지원한 러시아 태생의 피아니스트는 정부 관리가 아니기 때문에 단지 Van Cliburn의 비전과 우리 사명의 핵심인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임무에 따라 러시아 태생의 피아니스트는 ( Cliburn Competition ) 오디션을 볼 수 있다고 발표하므로 그들은 무대에 설 수 있었고 수상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세계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신냉전시대의 돌입을 불안하게 지켜보며 그 여파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시점에서 순수한 예술의 정신이 얼마나 고매하고 인류애적인가를 모든 세계인에게 여실히 보여 준 콩쿠르 였다.

이번 우승으로 상금 10만 달러를 받게 되는 임채윤은 앞으로 3년 동안 미국 및 해외 콘서트 투어 등 개인별 커리어 매니지먼트를 받고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할 예정이다.

수상후 인터뷰에서 임채윤은 아직 학생이고 아직 많이 배워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며 큰 대회에서 이렇게 큰 영광과 상을 받아야 하는 부담감이 있어 오늘 받은 영광에 걸맞게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18살 나이임에도 그의 흐트러지지 않은 생각과 담담한 모습은 겸손한 구도자의 모습이었다. 새삼 음악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폭넓고 깊은 교양적 교육역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너평 남짓의 연습실에서 흰건반 52,검은 건반36개의 피아노 한 대와 씨름한 그 많은 시간들, 하루 5-6시간 10시간 때로 12시간, 수없는 절망과 다시 일어섬, 뼈저린 고독함과 아픈 희열이 교차되는 무수한 건반위의 시간과 순간들, 결국 이 과정들을 통해 단련되고 정련된 고상한 한 인격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임을 알아 챌 수 있었다. 임윤찬이 존경하는 호로비츠 ( Vladimir Samoylovich Horowitz 19031989)에게서 또는 루빈스타인 ( Arthur Rubinstein 18871982 )에게서 동질의 수도사적 성화된 인격을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인간은 반드시 수도원에서만 수도사가 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임채윤은 세상의 모든 피아노의 커리어와 상관없이 그저 깊은 산속에 들어가 피아노와 살고 싶다고 말한다. 잘나가는 피아니스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 그가 연습하고 연주했던 수많은 멜로디와 리듬속에서 삶을 달관하기 까지 내면의 경험들을 쌓았으며 그 경험이 그의 연주에 깊이 있게 반영되어 탁월한 스킬 뿐만 아니라 독자적 곡해석의 창의성까지 보여주어 모든 심사원들로 부터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놀라움과 감동, 그리고 찬탄의 표를 던지게 만든 것이다.

클라이번이 차이코프스키에서 1등을 수상한 후 미국에 돌아와 환영 퍼레이드를 마치고 시청에 도착하여 청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존경한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지만, 나를 가장 흥분시키는 것은 당신이 클래식 음악을 존중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음악의 증인이자 메신저일 뿐이다. 모든 세대, 모든 젊은이들에게 음악은 그들의 마음을 인간답게 하고 그들의 태도를 고양시키며 그들에게 가치를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당시 23세 클라이번의 이 놀라운 성숙함 역시 음악이 그에게 안겨준 깊은 사유력 (思惟力)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 한국의 18세 소년은 어디에 서 있었을까전운이 채 가시지 않은 때, 전쟁의 상처를 가진 그는 부모를 잃고 황망한 길거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학도병으로 싸우다 죽거나 부상을 입어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소년이었을 것이다. 또는 날아든 파편에 맞아 팔다리가 없거나 유실된 포탄을 만지다 터져 눈이 안보이는 소년일 수도 있었다.

헐벗고 굶주린 소년들, 단지 먹기 위해, 단지 살아남기 위해 구두통을 둘러메고 신문지 뭉치를 옆에 끼고 폐허 위를 헤메었을 그 소년들......

결국 그때 그 18세 소년이 지금 여기 이 갈채와 함성 속에 의연히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길어야 할 기립박수,

그의 눈동자에 서린 우수는 우리가 견뎌낸 아픈 역사를 담고 있으며 조용함에도 그렇게 끈질기고 악착같은 승부기질, 그리고 그 의연함은 그토록 굶주렸던 배고픔, 그토록 서글픈 한()의 화신 (化身)이 되어 우리 앞에 이렇게 서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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