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교회 내부의 거짓과 싸우라


●하나님 중심으로 (Gott im Mittelpunkt)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Jesus Christus steht im Mittelpunkt)

●신중심신학 God-centered theology, Theocentrism

●그리스도중심신학 Christ-centered theology, Christocentrism


Mittelpunkt(중심, 배꼽)은 인간이 생활과 사유하는 과정에서 절대적 위치를 갖고 있는 의식이고 지식이다.

‘옴파로스’는 그리스어, ὀμφαλός로 ‘배꼽’이다. 옴파로스를 아는 것은 지식의 근본인데, 옴파로스를 모르기 때문에 텔로스(telos, 궁극적 목적)도 모른다. 그래서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나그네(노마드)를 미덕으로 삼는다.

노마드(Nomad)는 들뢰즈(Gilles Deleuze)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 (1968년)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개념으로 자리잡은 용어이다. 1940년대 현대철학에서 도상(途上)은 규정된 목적지가 있다고 상상했을 것인데,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방향이 없는 노마드가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유의 기본은 옴파로스에 대한 개념을 포기하고, 또한 목적에 대한 개념도 포기한 것이다.

우리는 옴파로스를 알아야 한다. 모를 때에는 잠정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모든 성씨(姓氏)들은 가문 기원 신화를 갖고 있다. 그것은 옴파로스를 모르거나 가문의 영예를 위해서 신화한 것이다. 모른다고 보아야 한다.

기독교의 기원은 하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와 현대신학에서 기독교 기원을 신화한 과정으로 해석했고, 또 그 때 수준에서 해석한 미비한 가치로 해석했다(ad hoc). 그래서 현대신학에서 신학 사유의 중심(centering)을 예수 그리스도에서 하나님으로 옮겼다. 근본주의는 신학 사유의 중심을 “성경과 사도신경”으로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표면적으로 보면 성경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이것을 과격하게 주도하는 진영은 “성경제일주의”라고 이념화시키기도 한다. 이것을 더 과격하게 킹제임스번역(KJV)만을 제일로 여기는 “킹제임스성경유일주의(King James Onlyism, Ruckmanism)”도 있다(나무위키).

계시의 기원과 인문학의 기원은 같지 않다. 계시의 기원은 신에게 있고, 인문학의 기원은 인간, 그것도 범죄한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에 근거하며, 기원은 동일하다. 인문학적 기원에서 올라가면 창조주 하나님이 나올 수 있고,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계시적 사유로 올라가면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이 나오게 된다.

인문학은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의 차축시대(車軸時代: Achsenzeit, BC. 800-BC. 200)로 기원을 새롭게 구획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인식론은 새롭게 구획되었다. 통신과 교통 기술의 발달, 측정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를 추구한다(고경태).

2차 대전 이후에 세계는 공간과 시간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고 소통하고 있다. 명확한 국경선, 확실한 돈의 형태 출현 등등 이다.

그런데 종교성은 기독교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동성애 혼인을 합법화시키면서, 동성애 성직자가 배출되고 있다. 그 사회가 로마 카톨릭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프로테스탄티즘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동성애에 대해서 강력한 규범이 없는 불교 국가나 이슬람 진영에서는 법제화가 없다. 서구 유럽 사회는 이슬람은 성장, 기독교는 급감소를 하고 있어, 16세기 좌절된 이슬람의 북진이 자연증가로 성취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은 계시적으로 정확한 옴파로스를 갖고 있어야 한다. 칼빈은 천상의 교리(heavenly doctrine)이라고 반복하여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의 옴파로스는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상보좌의 생명책과 그의 음성에 있다는 것이다. 유럽 사회는 1세기 교회와 역사적 연속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로마 교회) 로마가 옴파로스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강력한 로마 교회가 십자군 전쟁(十字軍戰爭, Crusades, 1095-1291, 예루살렘 왕국: 1099-(1187년 예루살렘 함락)1291)을 주도하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갔다.

교회가 천년동안 기독교적 사유로 인문학적 사유를 정립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오히려 인문학을 압제하면서 중세천년은 ‘진리 암흑기’로 정의된다. 교회에서도 천년은 ‘진리 질식기’이다. 교회가 진리를 어둡게 하고 질식시킨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로부터 이탈하고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자기 옴파로스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양심적인 지식인은 겸손하게 나그네의 삶을 고백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양심인은 아니다. 인간의 합리적 양심으로는 자기 그리스도인됨, 확실한 옴파로스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인됨을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기 옴파로스를 고백한다.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이웃과 함께할 옴파로스, 합리적 옴파로스를 찾는다. 옴파로스가 없다면 결코 인간은 설득될 수 없다. 정치적 타협은 가능하겠지만 설득은 불가능하다.

지식의 임시적 옴파로스는 도서관이고, 신앙의 임시적 옴파로스는 교회이다. 교회는 형식적이지 않고 영적이다. 보이는 건물이나 사람이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못한 몸은 교회가 아니다. 그래서 지상에 있는 교회는 전투적 교회(militant church)이다. 세상 흑암과 싸우는 기관이 아니라 교회 내부의 거짓과 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교회사는 세상과 전투의 흔적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가르침과 흔적이다.

오히려 교회의 거짓 가르침이 세상을 오염시키고 부패시켰다.

교회는 반드시 교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전함과 떡을 뗌과 교제로 서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도상에 있는 인간이 아니라, 옴파로스를 분명히 인식하고(계시의 권위) 목적지를 분명히 인식하고(계시의 가르침) 혼란과 고난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확실성과 불확실성이 교차되는 인간은 그리스도인이고, 불확실성 세계에서 확실성을 추구하는 인간은 인간이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주님의교회)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주님의교회)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