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드보이, 공동경비구역, 친절한 금자씨등 인기 있는 작품들을 연출한 박찬욱(1963. 8.23 ~ )이 출품한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이 칸 영화제 공식 소식지인 스크린 데일리(Screen Daily)의 평론가 평점에서 4점 만점에 평균 3.2를 받아 출품작 중 최고 점수로 75회 칸 영화제(Cannes Film Festival, Festival de Cannes)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 후 이 영화 헤어질 결심은 한국뿐만 아니라 스위스, 영국, 중국, 대만, 그리스, 미국, 프랑스 등 전 세계에서 개봉하게 되어 제작비 135억을 들여 월드박스 오피스 $15,000,000 이상의 수익을 올린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영화배우 박해일과 탕웨이가 수사관과 피의자로 등장하는 미스터리 수사 멜로드라마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이 스웨덴 추리 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The Laughing Policeman: A Martin Beck Police Mystery)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며 탕웨이가 돌보는 할머니가 스마트폰으로 즐겨 듣는 정훈희와 송창식이 함께 부른 옛날 가요 안개는 영화의 주제와 묘한 조화를 이루며 레트로(retro)한 매력과 함께 살해당한 등산 마니아가 듣던 말러(Gustav Mahler 1860- 1911)5번 교향곡의 교차를 통해 클래식의 품위까지 풍기는 영화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화제목 헤어질 결심은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한번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가슴깊이 숨겨져 있던 시린 상흔(傷痕)의 감성을 자극 받기에 충분하다.

남편을 살해한 범죄자와 이를 수사하는 형사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부적절한 사랑은 결국 탕웨이가 흠모하게 된 유일한 남자, 박해일을 위해 자신을 바닷가 모래에 묻으므로 미제사건으로 종결짓도록 만든다. 지독한 헤어질 결심으로 영화다운 막을 내린 셈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 헤어질 결심과 비교할 수 없이 냉혹하고 비장한 결심은 사실 혼자 살 결심이라고 할 수 있다.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는 그의 정치학에서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다”(Man is a social animal-zoo politikon)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같은 정치학론에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거나, 혼자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사회가 필요없는 사람은 짐승이거나 신이 틀림없다.”라고 말하기 까지 했다. 한문의 사람 인()자도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을 상형화한 것으로 사람의 본질을 잘 나타내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살 결심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 고독(孤獨)이다. 다시 말하면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배우자 또는 동반자가 없기 때문에 혼자 먹어야 하고 혼자 자야하고 혼자 결정해야하고 혼자 생활해야 하는 모든 일상의 삶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석상
아리스토텔레스 석상

헤어질 결심은 한번으로 족하지만 혼사 살 결심은 매일, 매순간, 내가 스스로 삶을 살고 버텨내야 한다는 외롭고 힘겨운 삶의 여정일 수 있다. 더 무서운 것은 혼자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 쇠약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자연히 활동량이 줄고 식욕이 저하되는 등, 건강악화로 단명하게 된다는 연구보고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2022년 행정안전통계연보를 보면, 주민등록세대는 23472895가구중 1인 가구가 9461695세대로 1인 가구 비중이 세대 유형 중 40%를 넘어섰다. 이는 통계 집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며 가히 충격적인 사회적 병리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한국사회의 거의 절반이 신( god ) 이거나 짐승들이 자리잡고 사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런 1인 가구 증가현상의 이유는 젊은이들의 결혼기피, 높아진 이혼율, 20대 자녀의 독립생활,부부불화나 사별의 독거 형태 때문으로 70대와 20대가 상위를 차지하고 30, 50, 60대 순으로 나타난다. 성별로는 남자 49.7%, 여자 50.3%로 비슷한 비중이다. 유럽이나 일본등 선진국인 다른 나라들도 사정은 거의 같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언젠가 혼자 살 결심을 하고 살아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로빈슨 크루소 ( The Life and Strange Surpriz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 Mariner ) 처럼 무인도에 혼자 사는 세상은 아니다. 나가면 길거리도 지하철도 버스도 시장도 어디가든 사람들로 붐비는 세상, 직장이나 학교나 어떤 단체나 언제든 만나고 웃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이 느끼는 고독이라는 것은 이런 환경과는 별개의 문제인 듯 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 1909 - 2002)1950년에 쓴 저서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은 역사적으로 사회성격을 인구변동과 함께 구분하면서 전통지향형(tradition directed type), 내부지향형(inner directed type), 외부지향형(other directed type)의 세가지로 분류했다. 오늘날 현대에 해당하는 외부지향형은 또래집단이나 친구집단의 영향에 따라 행동하는 현대인으로 특징지어지며 다른 사람들에게 격리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내면적인 고립감에 번민하는 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때문에 외부지향형의 시대는 자기상실의 시대로 대표되며 그 성격유형을 고독한 군중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른 말로 군중속에서 고독을 느끼며 사는 세대라는 것이다. 가까운 부부나 가족도 마찬가지다. 전정한 유대가 없고 사랑이 없다면 오히려 고독을 넘어 미움과 번민까지 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결국 혼자 살 결심을 가장 어렵게 하는 문제인 이 고독의 문제는 혼자 살든 둘이 살든 여럿이 살든 일반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혼자 살아도 고독하지 않을 수 있고 여럿이 살아도 고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 1909 - 2002)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 1909 - 2002)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다른 한편 생각해 보면 인간을 가장 인간되게 하는 것은 고독일 수 있다. 고독은 자신을 성찰하게 하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고독

그래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당신 안에 있다는 사실로 인해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된다고독은 어렵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임에 틀림없다.” 라며 고독의 필요성을 피력하고 있다.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1881) 역시 음식이 몸에 필요한 것처럼 고독은 마음에 필수적양식이며 자기실현을 달성하는 능력" 이라고 했으며 또한 "고독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단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고 고독 예찬론을 펴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고독의 전사 (戰士)로 불릴만한 니체 (Nietzsch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1900)는 그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의 초안에서 "나는 인간이 된 고독입니다." 라고 자신을 고독 그 자체로 표현했다. 칼융 (Carl Gustav Jung ,ˈkarl ˈgʊstaf ˈjʊŋ, 1875- 1961)이 언급했듯이 니체의 영감과 창조의 원천은 그의 숨겨진 절대적인 고독의 산물로 유추될 수 있다.

 

나는 인간이 된

고독입니다

-니체

니체는 그의 고독을 전통, 문화 및 사회, 그리고 종교와 인간자체를 냉철히 비판하고 폭로할 수 있는 철학적 도구로 변형시켰고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나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스타일의 체계적 철학이 아닌 새로운 범주의 사상가로 자신의 고독을 투사하여 현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오늘날 핵가족시대를 지나 1인 가구시대로 진화하며 우리는 왜 매일 비결혼, 저출산, 젠더, 고독사, 인구절벽 등의 단어에 익숙해져야 하는가? 사람마다 마음의 문을 닫고 사랑을 잃어버린 말세의 탄식이 아닌가? 사람들은 너도 나도 자기만 사랑할 뿐이다. 그러니 결국 자기와 혼자 살 수 밖에 없는 나 홀로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 3장의 말세의 징조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마태복음 24장에도 말세의 징조로 가장 결정적인 현상을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고 말씀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쫓겨난 인류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선악과인 셈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 사랑의 선악과까지 거뜬히 먹어 치워 씨를 말리므로 사랑 없는 세상, 사랑 없는 가정, 사랑 없는 교회로 만들었고 서로 버림받은 고독한 군중들은 매일 매일 혼자 살 결심을 하며 유리방황하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 처참한 사람이 곧 나 자신의 모습일런지 모른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그리고 이 사회 모든 인류가 고독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어떤 정책보다 우선 되어야 할 정책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회복하는 정책이며 그 정책을 시행하고 성취할 수 있는 존재는 교회와 성도뿐이다.

 

고독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길,

그리스도의 사랑을

회복하는 정책

사랑 없는 세상에서 사랑을 비추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고독을 배워야 할 때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시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요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본질을 지켜 내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고독하셨다. 결국 그 고독하심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하시고 구원을 이루신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고독은 혼자 살 결심의 1차원적인 고독이 아니다. 자신의 철학적 성취를 위해 스스로를 세상과 차단했던 니체의 2차원적 고독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독은 천국시민권자로서 부패한 세상에서 소금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3차원적 고독이며, 사랑 없는 세상에서 사랑의 화신이 되기 위한 헌신의 고독이며 주님의 고독을 이해하기 위한 영적 고독이다.

미국의 기독교청소년들은 정기적으로 락인 (youth Lock-in) 이라는 행사를 한다. 하루 이틀 또는 이삼일 그들은 최소의 절제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문을 다 걸어 잠근다. 손목시계, 스마트폰, 노트북 등 모든 물품을 반입하지 않으며 벽시계도 아예 가려놓는다.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 모른 채 성경책 한권만 가지고 교회시설 또는 기도원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그때는 서로 대화를 자제하고 말씀만을 묵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

youth Lock-in (미국의 유쓰 락인의 한 포스터)
youth Lock-in (미국의 유쓰 락인의 한 포스터)

부활절전 고난주간에도 금식 외에 자신이 빠져있는 한두 가지 물건이나 습관에 대한 금식(Fasting)을 함께 한다. 스스로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중독되어 있지 않은가 자신을 철저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문화, 인간관계, 교회생활, 교회행사, 정말 이대로 괞찮은 것인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방식, 나의 사고, 나의 습관,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진정한 고독, 남을 사랑하기 위한 고독을 위해 나 자신의 락인 (Lock- in)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전 7:29~31)

Azusa Pacific Univ. Calvin Theological Sem. yeesaak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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