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닮아가는 교회 정치제도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성경밖에 길이 없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등, 저서로는 주기도문연구 등이 있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등, 저서로는 주기도문연구 등이 있다.

한국사회의 끊임없는 논쟁 주제가 공정과 상식, 정의의 잣대와 공의가 제대로 작동하는가이다. 우리 국민들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다.

한때 정치권에서 회자되었던 문장이 있다.“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가슴 설레는 희망의 문장이었다. 인생이 생각대로 순탄하지도 않고, 공정한 룰이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고 살기에 기회를 박탈당한 분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 공정이란 단어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하버드대 샌덜 교수는 정의의 열풍을 일으켰던 주인공이다. 27세 하버드대 최연소 교수, 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는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에서 정의론을 비판했다.

 

정의(Justice)

올바른 정의는 무엇인가?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가 피해를 보는 것이 정의로운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가 피해를 보는 것은 정의로운가? 개인의 정의와 공동체의 정의가 충돌할 때 합리적인 답은 무엇인가? 마치 개인주의가 정의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게 된다.

내 정의가 세상의 진리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잘되면 내가 잘한 것, 못하면 남이 잘못한 것으로 말한다면 그 정의는 올바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정의는 무엇인가? 정의 잣대를 어떤 이념의 기준에 두는가에 따라 그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성경의 기준은 나도 죄인이고 너도 죄인이다. 우리 모두 죄인이다. 내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그러면 공동체가 보이고, 진짜 다같이 잘 살아가는 정의로운 사회가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공정(公正)

샌덜 교수는 내 노력으로 얻은 사회적인 지위, 재물, 성취 등은 인정받아야 한다. 이런 통념적 생각을 뒤집어 놓았다. 순수하게 네 힘으로 했느냐? 부모 찬스 없이 네 힘으로 성공했느냐? 오늘날 이런 말을 공공연하게 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 사회, 학력차별주의, 상류엘리트들의 사회적 일자리 독식, 기회의 평등이 사라졌다. 누구나 오르고 싶은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가 동일하게 주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수능시험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출발선이 다를 경우. 그 수능시험이 공정한가? 좋은 점수를 받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사회적 지위와 부를 누릴 경우 그 사회가 공정한가? 그러면 부모찬스를 못 얻어 공부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을 좌절시켰다면 그 사회가 공정한 사회인가? 우리는 학력제일주의, 스펙만능주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공정한가? 비판적 의식이 필요하다. 자기의심, 자기 비판적 시선을 유지하면서 그러지 못한 조건의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공공의 선을 이루는데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공정의 문제를 다룰 때, 출발선이 중요하다. 그 기준점은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며 선물이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시간, 재능, 물질, 건강, 일터, 가정.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잠시 맡겨준 것이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종이다. 청지기는 주님이 맡기신 것을 지혜와 성실로 관리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사는 것이다.

남보다 하나 더 가진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하나 더 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은혜이다. 그 은혜를 나누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공정한 공동체가 된다.

 

●상식(常識)

상식이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가치다. 그 가치를 준수하는 것이다. 성혁명을 외치는 무리들이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주장한다. 급진적 성혁명진보주의자들은 사회적 젠더 70가지를 다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리사회의 보편적 가족의 가치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개인의 권리주장이나 법의 행정처리도 우리 공동체가 인정하는 보편적 가치 안에서 인정하고 준수할 때 사회 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공의(公義)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법시스템은 공평하게 적용되는가? 우리 사회에 던져지는 물음이다. 일명 법꾸라지들은 법의 논리로 모두 빠져 나가고, 법에 문외한들은 철저하게 사법시스템에 농락당하지는 않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국민들은 가지고 있다.

다윗의 국정 통치 운영 철학은 정의와 공의로 백성”(삼하8:15)을 다스렸다. ‘정의진리에 맞게 바르게 사는 것이다. ‘공의’()은 히브리어로 미쉬파트이다. 의미는 재판의 판정’, ‘사법적인 결정이 옳은가? 이다. ‘’()는 원어로 체다카이며, 의미는 정직’, ‘올바름’, ‘으로 해석된다. 공의란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떠난 재판장의 공정한 판결을 말한다. 하나님은 만민에게 공의를 세우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면 모든 공의로운 싸움은 실패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공의와 정의의 정치를 행함으로 백성들을 평안하게 살도록 도왔다. 다윗의 정복 전쟁은 공의로 시작했고 정의롭게 마쳤다. 다윗의 통치이념은 하나님 뜻을 바르게 실현하는 것이다.

다윗은 모든 백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했다. 지역적 편견이 없었다. 지도자로서 다윗의 정치는 지역적 편견 없이 똑같이 대했다. 지도자는 특정 집단이나 자기와 연관된 사람들을 선호해서 정치하면 안 된다. 한국사회는 지연, 학연, 연고의 카르텔이 참 강하다. 그 견고한 아성들을 깨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여와야가 손잡고 한마음으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기대하기가 참 어려운 나라이다. 국정의 파트너를 선택할 때 능력과 공정과 상식이 있는 분들을 기용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최소한 국민들의 눈높이에 어느 정도 수긍이 되어야 한다. 그래도 희망을 품고 기대하고 있다. 나와 내 후손들이 살아가는 나라이기에 지도자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다윗은 빈부귀천에 관한 편견이 없었다. 신분에 있어서 남녀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공의로 정치했다. 다윗은 소외되고 가난한 계층들을 돌보고 온정을 베풀었다(72:1,2). 예수님의 사역도 가난하고, 힘없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지식은 더 많아지고 제도는 점점 세분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공동체 곳곳에서는 공의와 상식과 정의와 공정의 법칙이 무시되고 끼리끼리 쌈싸먹는 정치가 횡행하고 있다. 다윗은 공의와 정의로 나라를 이끌었던 지도자이다. 길이 안 보인다면 성경에서 그 해법을 찾으면 좋겠다. 교회공동체부터 공의와 상식과 정의가 회복되면 좋겠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것"(미6:8)이 아니냐 물었다. 세상을 닮아가는 교회정치 제도는 이제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 한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성경밖에 길이 없다. 타락한 마음에 비단옷을 덮는다고해서  사람이 변하겠는가?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이 문제이다. 한국교회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사람이 답이다. 그러나 사람이 문제다. 성경이 마음의 거울이고 표준이고 기준점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