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1:11-24)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한 사도인데 그가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 계시로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계시를 받기 전 상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받기 전의 상태에 대해서 여러 표현을 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빌 3:4-6) 등 여러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유대교에 있을 때”(13절, way of life in Judaism/Jews' religion)라고 했고,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14절, I was advancing in Judaism)고 했습니다. 이번 말씀은 ‘유대교’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대교’라는 말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소견을 따라 말씀을 전할 때 믿음의 도전이 되며 유익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먼저 성경에는 ‘유다(Judah)’와 ‘유대(Judea)’가 있습니다. 참고로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은 성경의 팔레스타인(블레셋)이 아니라, 19세기에 이름이 고착되었다는 것입니다. * 1865년 PEF(Palestine Exploration Fund)가 설립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땅의 이름이 통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유다’ 지파와 ‘유다’ 왕국이었고, ‘유대’는 ‘바벨론’과 ‘바사’ 제국에서 정복한 땅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옛날 한자어를 사용할 때에는 ‘유다’와 ‘유태(猶太)’였는데 언제부턴가 유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유다인이 같지 않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유대인일까요? 유다인일까요?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갈릴리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갈릴리 사람보다 더 천한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자기를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예수님의 자기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이라고 확정하면서, 다른 면에서 예수님의 의식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유대인보다 갈릴리 사람, 나사렛 사람,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성경대로 다윗의 후손, 갈릴리 사람, 나사렛 사람이라고 말합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유대교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유대교’ 혹은 ‘유대주의’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 유대주의는 무엇일까요? 유대교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할 때에 동조한 사람들로 규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유대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할 때에 로마 총독 빌라도와 헤롯까지 친구가 되었고 열심당원과 로마 군대까지 협력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모두가 협력하고 동의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는 것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들의 결정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바울도 적극 동의했습니다. 바울은 그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열심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예수를 추종하는 무리를 박해 정도가 아닌 박멸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유대교 시절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심하게 박해했다고 고백하며 멸하려고 했다고 고백합니다(13절). 우리는 성경에는 ‘기독교’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바울은 개종(conversion) 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출교라는 어휘가 있었습니다(요 9:22). 출교는 이단으로 규정될 때 시행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출교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저주의 상징인 나무에 못박혀 죽게 했고, 그의 추종자들이 부활을 주장하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장 앞서서 박해하며 멸하려고 나섰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개종 전의 상태를 명확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 개종 전의 상태와 유사하거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경험을 밝히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경험, 과거 상태를 밝히는 것은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입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말씀드리는 것에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파생되거나 나온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구약성경, 제2성전에서 지시한 메시아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주전 19년에 시작된 헤롯 성전의 영광을 좋아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에 실망했던 사람들이 헤롯 성전의 위용을 보면서는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조롱까지 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연관을 지으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유대교에서 하나님(그리스도)의 교회로 개종한 역사로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반감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300년 동안 박해를 받았고, 유대교는 기독교 제국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유대교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를 연관시키지 않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서 즉각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에서 잠깐 후퇴하면 즉각 유대교로 들어가게 됩니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해체하고 유대교나 다른 이교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16세기 루터와 칼빈은 로마 카톨릭주의가 유대교의 전형처럼 생각하고 비판했습니다. 즉 기독교가 유대교로 전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기독교는 하나님의 교회가 사회화되면서 파생된 어휘입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아닌 하나님(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려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를 모르거나 박해하는 사람들이 주의 음성을 듣고 개종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가 되며 일꾼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탈-기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유럽은 천 년 전의 거대한 예배당들이 비어 있어 문화 관광 명소로 이용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교회의 예배당은 편이성은 현대적이지만 예술적이고 문화적 가치는 부족합니다. 교회는 오직 주의 영광이 거하는 처소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는 유대교에 가장 열성이 있는 한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은혜에 바울은 가장 앞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의 사역을 무너뜨릴 다른 복음을 본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함께 교회에 편지를 보내서 복음을 변호했습니다. 그 일에 바울 자기를 변화시킨 주님의 은혜 복음을 전합니다.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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