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효목사. 1983년 2월 스위스 사역시작, 취리히 중앙교회, 바젤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 담임. 총신대학교신학 대학원졸업, 스위스한인교회 홈페이지 www.koreanchurch-swiss.com
김정효목사. 1983년 2월 스위스 사역시작, 취리히 중앙교회, 바젤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 담임. 총신대학교신학 대학원졸업, 스위스한인교회 홈페이지 www.koreanchurch-swiss.com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31-34)“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7장 29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입니다.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 초기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의 한 산에서 행하신 설교인데, 예수님의 이 산상수훈은 사실상 구약의 <율법>을 재해석하여, 그 폭과 깊이를 더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5장-7장)>은 내용상 <5 단락>으로 구분됩니다.  

(1) 여덟 가지 복(5:3-12) 

(2) 성도의 삶과 구약 율법(5:13-48) 

(3) 구제와, 기도와, 금식(6:1-34) 

(4) 순전(純全)한 삶의 원리(7:1-12) 

(5) 그릇된 신앙에 대한 심판예고(7:13-27)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자세>에 관한 가르침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헛된 신앙>과 <바른 신앙>의 태도가 어떻게 다른 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사진 제공 : 김정효 목사 스위스의 산동네(Schwarzenburg)
사진 제공 : 김정효 목사 스위스의 산동네(Schwarzenburg)

 

1. <헛된 신앙>과, <바른 신앙>은 <기도의 자세>에서 <차이>가 납니다(마태복음 6:5-15) 

(1) <외식(外飾)하는 기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하는 기도가 <외식의 기도>입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5-6)“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되는 <쉐마> 곧 <민수기 15:37-41, 신명기 6:4-9, 신명기11: 13-21>의 말씀을 <암송>하면서 <일정한 형식>에 따라 <기도>를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 6:4-9)" 

<경건한 유대인>들은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등 <하루에 3번>의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그 시간에는 어디에 있던지 일어나서, 손을 앞으로 뻗고,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도록 한 채,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되어간 <다니엘 선지자>였지만, 경건한 <다니엘 선지자>는 비록 위험이 따를지라도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습관>을 포기치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詔書)에 어인(御印)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 6:10)" 

<초대교회 사도>들도 <유대의 전통>에 따라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사도행전 3:1)" 

"이틑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사도행전 10:9)"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사도행전 16:13)"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사도행전 16:16)"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의 역사(役事)>는 항상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는 <경건한 기도자>들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깊이 상고하기 보다는 <형식적 절차>로 해치워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외식(外飾)하는 자>들은 <기도시간>에 맞춰 일부러 사람이 붐비는 곳으로 가, 그곳에서 <기도의 퍼포먼스>를 행했습니다.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마태복음 6:5)"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외식적 기도>를 단호하게 꾸짖으셨습니다. 

 

(2) <중언부언(重言復言) 하는 기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을 요란스럽게 <반복>하거나, 겉만 번지르한 <긴 기도>를 <경계>하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7-8)" 

 

(3) 예수님께서는 <바른 기도>를 위해 <주기도문>을 <기도의 모델>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 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9-13)" 

                                                                                                            (4) 사람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은 없었는지를 살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 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26)" 

 

(5) <용서하는 기도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 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6:14-15)“ 

<신자>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드릴 수 있게 된 것은, 대속 주(代贖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로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한 <사죄의 은총>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에 대한 <사죄의 은총>을 덧입은 <신자>가 자신에 대한 타인의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하지 못하여, <적의와 분노>를 품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그에게는 결코 하나님께 <기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대화>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도의 동기는 <사람의 이목>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께로만 향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진 제공 : 김정효 목사 스위스의 산동네(Schwarzenburg)
사진 제공 : 김정효 목사 스위스의 산동네(Schwarzenburg)

 

2. <헛된 신앙과>과 <바른 신앙>은 <금식의 자세>에서 차이가 납니다. 

„금식할 때에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16-18)“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는데, 그들 중에는 <금식을 자랑>하기 위해, 세수나 빗질도 하지 않고, 심지어 굶어서 창백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얼굴에 횟가루를 바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는 순전히 자신의 <경건의 허상>을 내세우려는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했습니다. 

<금식의 목적>은 잠시 모든 <일상생활>을 내려놓고 <삶의 원점>으로 돌아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삶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는 것인데, <외식자(外飾者)>들은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한 금식‘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을 함으로써, 그들의, 일상적인 죄'에 더하여, 하나님을 이중으로 모독하는 죄'까지도 범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금식 그 자체를 비판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당시에도 <금식>은 훌륭한 <경건훈련>으로서 <권장>되었는데, 이는 금식이 그 자체의 유익과 더불어 신자에게 <절제의 덕>을 배양시켜주고, <육신의 정욕>을 다스리게 해주며, 하나님께<기도하고 싶은 마음>과, <회개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제공 : 김정효 목사 스위스의 산동네(Schwarzenburg)
사진 제공 : 김정효 목사 스위스의 산동네(Schwarzenburg)

 

3. <헛된 신앙>과, <바른 신앙>은 <선행의 자세>에서 차이가 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1-4)“ 

<유대인>들은 <구제>를 가장 중요한 <신앙행위>의 하나로 여겼습니다.  

이는 <구약 율법>에서 누차 <반복된 명령>이기도 합니다(신명기 14:29, 24:19-21, 26:12). 

그리고 성경에서의 <구제의 대상>은 일하고 싶어도 일할 능력이나, 기회가 없는 사람에게 국한되었으며, 게으른 자는 제외되었습니다. 특히 <고아>와 <과부>가 우선적인<구제대상>으로 지목되었습니다(시편 10:14). 

<구제>는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 있는 자들을 향한 <사랑의 손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행하는 이유가 가난과 궁핍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정>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기 의(義)>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결국   <불행>에 처해있는 사람들까지도 이용하여 자기의 <헛된 명예>, <헛된 영광>을 얻으려는 지극히<파렴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의 수고>는 <그 차체가 목적>이어야지, 그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시편 10:14). 

사진 제공 : 김정효 목사 스위스의 산동네(Schwarzenburg)
사진 제공 : 김정효 목사 스위스의 산동네(Schwarzenburg)

 

4. <헛된 신앙>과, <바른 신앙>은 <신앙의 목적>에서 차이가 납니다(마태복음 6:19-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6: 4)“ 

<인격>과 <의지>와 <영혼>이 하나인데, 그 추구하는 바가 둘로 나눠지면, 그 사람은 결국 <자아분열>을 일으켜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실로 제한된 <인간의 능력>과 <인간의 의지>로는 어느 하나에 <최고의 가치>를 두게 되면, 자연히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재물>에 <마음을 빼앗긴 자>는 동시에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으며, 결국 하나님을 떠나 <물질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31-34)“ 

 

<헛된 신앙>은 그 본질이<인본주의 신앙(人本主義 信仰)>입니다. 그 중심에 <사람(自我)>이 있고, <사람(自我)의 영광>을 구함이 그 <신앙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을 의식하며 <위선>을 행합니다.  

<바른 신앙>은 그 본질이<신본주의 신앙(神本主意 信仰)>입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영화롭게> 함이 그 <신앙의 목적>입니다. 

이 같은 <신앙의지>가 <종교개혁자들의 구호>인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 곧 <하나님 면전에서! >의 <신앙의지> 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 하시 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 1-20)“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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