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예배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아난다고 한다. 나름대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어떤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하고 물으면 답을 잘 못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예배의 원형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배에 목숨을 건 아벨은 그 예배로 인하여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든 예배를 드림으로 가인의 시기를 받고 결국 형 가인에게 죽었다
지금 예배당을 개혁한다면 그 반발은 클 것이다. 진짜 예배를 보고 싶은가? 건물 중심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웅장한 예배당에서 드려지는 보는 예배가 예배의 원형일까? 예배당에서 예수님의 보좌에 앉으신 자리는 마련했는가? 예배 순서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순서가 들어 있는가?
예배의 핵심은 오직 주님만 높아지는 시간이다. 그리고 주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하나 되는 통합을 이루고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 되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이루고 하늘과 땅과 하나 되는 시간이다.
예배는 공동체가 서로 하나 되는 거룩한 삶의 실천이다. 단순히 의식만 드리고 20분 설교를 듣고 혼자 있다가 각자 사라지는 홀로 드리는 매번 형식적인 예배로는 우리의 삶의 변화를 이루기 어렵다.
예배 자체가 곧 삶의 변화의 순간이 되려면 예배가 공동체가 함께 하는 시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찬양과 기도를 통한 영적 만남, 말씀을 통한 인격적 만남. 이웃과 소통하는 교회공동체의 교제와 세상을 복음으로 하나 되는 비전을 보게 하는 예배가 되려면 현재 우리의 예배는 많은 면에서 갱신과 변화가 필요하다.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잔치의 재현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같이 함께한 최후의 만찬과 같은 예배가 필요하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행해야 할 예배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20절에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으로 시작되는 구절은 앞으로 예수님이 보여줄 예배를 암시하고 있다. 요한복음 13장부터는 예수님이 유월절 죽기 전날에 제자들과 같이한 마지막 시간으로 그것은 앞으로 예배를 재현하고 있다.
17장까지 이어지는 5장의 긴 내용은 요한복음의 다락방 강화로 알려진 요한복음의 중심 내용이다. 이 구조로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섬기는 것으로 예배자의 봉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떡과 잔을 나누면서 영적 교제를 나누는 장면은 우리의 예배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예배 중에 성찬을 나누는 일이 이것에 해당한다.
그리고 긴 시간을 제자들과 말씀을 주고받는다. 앞으로 오실 성령의 내용까지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요한복음 17장에 대제사장 기도는 서로 하나 되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무리 된다. 예배의 마지막의 모습이다.
예배를 마친 후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신 후에 잡혀 십자가에 죽으신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린 후에 세상에 파송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세상에 나가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예수님 자신이 모델로 보여준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의 예배를 살펴보면 가장 부족한 것이 일방적 말씀 선포로 마치고 말씀의 교제와 나눔이 없다는 점이다. 성찬하기 어려운 예배 구조도 문제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가 성찬과 서로 주고받는 가르침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구조로 예배의 갱신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특히 예배와 가르침을 분리하는 지금의 예배 구조를 가르침을 통합한 예배로 나갈 때 진정한 예배가 회복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예배 속에 가르침이 포함되었는데 이것을 분리시킨 것은 헬레니즘의 영향이 산물이다.
말씀과 기도를 분리하는 것처럼 설교와 가르침을 분리하는 상황이 예배 속에 형성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헤브라이즘의 성경적 구조는 기도와 말씀은 서로 하나다. 기도가 말씀이요 말씀이 곧 기도다. 예배는 이것이 서로 통합되는 사건이다. 그럴 때 예배를 통하여 변화를 이루어 세상에서 예수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지금의 정해진 의식에 참여하는 정도의 예배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머물기 쉽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예배를 경험하기 어렵다. 예배는 프로그램이 아닌 삶이다. 예배는 모든 곳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이 부름의 장소이며 그곳이 예배의 현장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주님은 만유의 주님이시고 세상을 만드신 유일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예배도 특별한 장소만 아닌 어디서나 주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주님은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신다.
물론 정기적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언약 공동체를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선포되는 예배당 모임은 우리의 신앙을 세우는 데 아주 중요하다. 다만 이런 공적인 예배를 통하여 온 세상에서도, 일상생활 속에서도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
우리의 모든 삶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루스가 벧엘이 되는 예배가 진정 우리가 꿈꾸는 예배의 모습이다.
이런 예배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지금 예배와 설교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오직 1인 설교자에 집중하는 지금의 수동적인 예배자에서 스스로 능동적인 예배자로 전환하기 위해서 함께하는 예배방식을 제안한다.
부서와 연령별로 나누어진 예배를 전 세대가 함께하는 통합예배가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서는 모두가 예배의 주체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주님의 몸 된 공동체를 세우는 통합 예배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의 설교 중심의 예배방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예배를 설교가 이끌어가기보다는 말씀이 이끄는 방식으로 주인을 바꾸는 일이다. 설교 시간 중에서 50%는 공동체가 함께 소리 내어 성경 읽는 시간을 갖는 일이다. 중간 중간에 목회자의 읽은 말씀의 의미를 전하는 설교가 이어진다면 어떨까? 가능하면 예배중이나 예배 후에 소모임으로 오늘 말씀을 적용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모두가 함께하는 예배가 될 수 있다. 영적으로 깊은 예배가 되려면 말씀을 깊게 공부하고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진리 속에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을 만날 때 진정한 예배를 체험하게 된다.
지금 같은 20분 정도의 말씀으로는 깊은 예배를 드리기 어렵다. 3시간 정도 되어야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밤까지 늦은 밤까지 강론하다가 유두고가 난간에서 떨어져 죽었다. 바울이 그를 다시 살리고 나서도 강론은 계속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천상 예배의 책이다. 언젠가 요한계시록 말씀 사경회를 3일 동안 계시록 22장까지 전체를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말씀과 찬양과 기도를 연속해서 가졌다. 하루에 12시간씩 3일 동안 30시간을 예배로 드린 적이 있다. 지루하지 않고 말씀 속에 푹 빠지는 시간은 특별한 예배체험이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다시 일주일간 삶에서 상고하고 묵상하며 가족 밥상머리 예배로 이어진다면 삶의 예배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수레바퀴처럼 순환한다면 날마다 모든 곳에서 예배가 드려지게 될 것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편14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