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취해야할 태도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긍휼한 태도입니다(5복).
둘째로 깨끗한 마음입니다(6복).
셋째로 화해자입니다(7복).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극적으로 평화가 임하도록 헌신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화평케하는 자를 영어로는 Peacemaker라고 합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1)평강의 뿌리이신 하나님
그러면 평강의 뿌리는 어디에서 출발합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평강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롬 15: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얻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나님의 존재의 뿌리는 평화의 왕입니다. 예수님의 존재의 뿌리도 평화의 왕입니다. 하나님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평화를 싫어합니다. 분쟁을 좋아합니다. 전쟁과 폭력과 간음과 어둠과 싸움과 갈등과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혼란과 질투와 논쟁과 분노를 좋아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를 사랑하십니다.
2)화평의 의미 연구
(1)‘화평’(헬,‘에이레네’)의 의미는 단순한 마음에 평화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드는 자를 말합니다.
(2)구약의 동일한 단어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샬롬이란 국가 관계나 개인 관계에서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분쟁없는 관계를 말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인사말로 ‘샬롬’ 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샬롬이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선’을 의미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샬롬’이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단어가 있다면 화평, 평화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화평의 반대, 평화의 반대어는 분쟁, 전쟁입니다. 분쟁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평화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모든 것이 잘되는 상태가 평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곳, 하나님의 의의 통치와 거룩한 나라가 세워지는 곳이 바로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없는 곳에는 평화가 사라집니다. 언제나 죄가 있는 곳에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자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는 평화를 깨뜨리는 원인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쟁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3)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특징
(1)화평케하는 자는 막힌 담을 허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왕이요 주인이며 심판자이며 부활하신 생명의 예수님은 십자가 피로 모든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헐었습니다(엡 2:13-16).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견고한 담을 화평으로 허는 분들입니다.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마 5:43-48, “(44절)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늘과 계신 너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행 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만약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묵은 감정을 가지고 계속 그를 접대합니까? 높은 담을 쌓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담들을 허물어 화평을 일구워 가는 분들입니다.
(2)화평케하는 자는 대가를 기꺼히 지불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비폭력으로 하나님 나라 회복 운동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친히 죽으심으로 평화를 인류에게 선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몸소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세상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위임하셨습니다(고후 5:17-18).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베드로는 예수님이 화해자가 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셨음을 전해주고 있나요(벧전 2:22-24).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3)화평케하는 자는 폭력적인 방법을 싫어합니다.
화평케하는 자는 감정이 없는 분들이 아닙니다. 속이 없는 분들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 소중한 것도 압니다. 피해를 당하면 속상하고 아픕니다. 모든 것을 다 느낍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다릅니다. 반응이 다릅니다. 행동하는 것이 다릅니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하고 절대로 폭력적인 언어로 싸우지 않습니다. 폭력을 싫어합니다. 비신앙적인 방법을 거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 성경의 방법을 끝까지 지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평화의 복음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평화의 복음이 내가 받은 상처보다, 내가 받은 피해보다, 내가 받은 억울함보다, 내가 받은 불이익보다 평화의 복음이 더 깊고 더 넓고 더 높아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넉넉한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경질 잘 내는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은 절대로 화해자가 되지 못합니다. 자기 의와 자기 교만에 가득찬 사람도 화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법은 비폭력입니다. 무저항주의입니다.
총으로 위협했다고 총으로 똑같이 사용하는 것은 예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총을 들고 왔다면 우리는 아무런 무장없이 몸으로 맞이하며 그 자리에서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아주 미련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싸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 흉년속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홀로 거부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받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파놓은 모든 우물을 다 막아버립니다. 이삭이 그랄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자녀의 품성을 지켰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창 26:24-25, 28-31).
(1)여호와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났습니다. “두려워하지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되리라”
(2)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느니라. 우리와 계약을 맺자,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화평을 만드는 자들이 받는 복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저 사람 진짜 예수믿는 사람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