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여성 의료 선교의 문을 활짝 연 로제타 홀

  • 입력 2022.09.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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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81)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93)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44:4-5).

926일 정부는 실외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하고 착용 권고로 전환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제 팬데믹의 암운(暗雲)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퍼펙트 스톰(고금리, 고환율, 고물가)으로 세상은 너무도 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더욱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만 바라봐야 할 때이다. 환난과 핍박이 클수록 우리는 주님을 자랑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힐랄레누)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노데 셀라)”(44:8).

이 시편 44편은 공동체 탄식 시편으로서 시 12, 58, 60, 74, 79, 80, 83, 85, 90, 94, 123, 126, 129, 137편 등이다. 시편 44편은 개인 탄식 시(I-Psalm)와 공동체 탄식시(W-Psalm)으로서 본질적인 진리를 말하며 탄식하는 기도자는 재난의 성격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한다.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21).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압제를 받고 고난을 받았을 때 사무엘은 큰 국난의 위기에서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이라 하고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자 위기를 극복하는 역사가 일어난다(삼상 7). “하나님이여(엘로힘)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포알 파알레타 비메헴)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베아즈네누)”(44:1).

왕정 시편인 시 44편은 개인 탄식 시편이자 공동체 탄식시으로서 이스라엘 회중과 연관되어 시편 기자는 부르짖음의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간구한다. “우리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짜레누)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베쉬메카) 밟으리이다(콰메누)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로 베콰쉐티 에브타흐)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로 토쉬에니)”(5-6). 하지만 우리는 대적자의 조롱과 능욕, 수치, 비방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며 환난을 당하고 있다(13-16). “나의 능욕이(케리마티)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보쉐트) 내 얼굴을 덮었으니(키사테니)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미콜 메하레프)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오에브 우 미트나퀨) 때문이니이다”(15-16). 결국 공동체가 개인과 연결되어 있어서 공동체 탄식시이자 개인 탄식시인 시편 44편은 우리 상황을 잘 보여주며 메시아 왕정 시편의 성격을 보인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호라게누) 도살할 양같이(케쫀 티브하)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우라)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라마 티샨) 일어나시고(하키차)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22-23). 결국 희생 제사의 예배를 통하여 매일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일어나(쿠마) 우리를 도우소서(에즈라타) 주의 인자하심으로(하세데카)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우페데누)”(26).

이러한 극심한 탄식 속에도 구원의 길을 여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이다. 북한 지역에서 선교 병원을 연 선교사들의 발길들이다. 그중에 로제타 홀 선교사와 웰즈(우월시), 샤록스(사락수), 파이팅(황호리) 등이다. 평양의 의료 선교는 1892년 홀 의사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1893년 평양 서문에 한옥을 구입하여 진료소를 설치하여 의료 선교를 시작한다. 189510월에 청일 전쟁이 끝난 후 홀은 마펫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부상자와 전염병 환자를 치료한다. 홀은 과로한 데다가 이질에 걸려 서울로 귀환하였는데 서울로 오는 중에 발진티푸스에 겹쳐 그해 11월에 사망한다. 홀의 사후 그의 부인 홀 여사(Rosetta Sherwood Hall, 1865.9.19.-1945.4.5.)가 기금을 마련하여 그를 기념하는 홀 병원(기홀 병원)을 세운다. 이 병원은 1895년 폴웰이 맡았고 폴웰과 홀 부인의 노력은 기홀 병원은 관서 지방의 굴지의 병원으로 발전하여 개원 후 4년 동안 24,000명을 치료하게 되었다.

홀 부인은 남편의 소천 이후에 189851일 다시 부인 진료를 시작한다. 이때 평양 감사가 부인 진료소에 광혜여원(廣惠女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1900년 박에스더는 홀 부인에게서 의료 수업을 받다가 추천을 받아서 미국에 유학하여 최초의 여성 의학 박사가 되어 귀국하여 의료 봉사를 하게 된다.

로제타 홀과 박에스더 여사
로제타 홀과 박에스더 여사

박에스더는 1910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홀 부인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여 결핵 병원 설립의 필요를 절감하고 해주 결핵 요양원을 세우는 계기가 된다. 홀 부인은 여성 진료 이외에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치료와 점자 교육을 실시하였고 자신의 죽은 딸 에디스 마가렛 이름을 따서 마가렛 어린이 병동에서 교육을 시작한다. 또 홀 부인은 1899년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학교를 열었다. 이처럼 한국은 빛의 여전사, 빛의 선교를 하러 들어온 의료 선교사들의 봉사를 통해 구원의 빛을 받고 복음의 나라로 변하고 있었다. 역사 속에 빛이 비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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