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 밖은 물론 교회 안에서 흔히 사용되는 개념 중 하나가 “치유”이다. 최근 10 여년 간에 심릭학과 상담학의 영향을 받아, 목회 상담학의 득세로 치유, 내적 치유, 치유 목회, 치유 상담이 말이 홍수처럼 밀려오고 밀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내적 치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상이다. 내적 치유는 인본주의 심리학, 신비주의 수도원의 영향으로 성경 진리와 위배된다는 입장과 신학적 인간관을 넘어 통합적 인간 이해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그러나 실천신학의 목회 상담학 입장에서 인간을 통합적으로 전인격으로 이해와 문제해결을 위해 <내적 치유>라는 개념과 그 방법론이 점치 수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1. 내적 치유가 필요가 요청되는 시대상
요즈음 흔히들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내적 치유”이다. 한 인터넷 신문에서 “상처를 쉽게 받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란 글이 있었다. ① 자기중심의 삶보다 타인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② 자신의 감정보다 타인을 과하게 배려하는 사람, ③ 자기 생각보다 타인의 생각을 먼저 존중하는 사람, ④ 타인의 눈치를 많이 살피는 사람, ⑤ 자신의 목소리를 전혀 내지 않는 사람, ⑥ 자신에 대한 신뢰가 약한 사람, ⑦ 자기주장은 강하면서 마음이 여린 사람, ⑧ 타인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엄청 노력하는 사람, ⑨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이면 목숨을 줄 수 있는 사람, ⑩ ‘자신’외에 모든 사람들을 자기보다 위대하다고 여기는 사람, ⑪ 어떤 상황에도 불문하고 위축되어 있는 사람 등을 제시하면 이런 사람들의 내적 상처를 치유 해 한다고 역설하였다(참조: www.dtnews24.com).
<내적 상처치유>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내적 상처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미국에 많은 가정에서 알콜 중독자로 인하여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가장인 아빠가 알콜 중독자가 되면 가정을 돌보지 않을 뿐 아니라 가족 간에 많은 아픔과 갈등이 있게 된다. 가정에 엄마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도 역시 가정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알콜 중독자들을 위한 치료 프로그램이 시작되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통하여 정기적인 만남과 모임을 통해 알콜 중독으로부터 벗어 나도록 돕고 필요시 의사의 도움과 함께 치료에 힘쓰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 삶이 변화되고 다시 직장생활과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담당자들은 이제 알콜 중독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행복한 가정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상 문제는 그 이후에도 발견되었다. 알콜 중독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드러냈던 가족들이 가장이나 엄마가 알콜 중독으로 부터 벗어나 변화되어 새 삶을 살게 되었는데 여전히 가족들이 가족 간에 갈등과 문제를 직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원래 가정의 문제와 갈등 원인이었던 알콜 중독자들이 중독에서 벗어나 변화되어 새 삶을 살게 되었는데도 가족들이 여전히 많은 갈등과 문제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발견하게 된 것이 [내적 상처]란 것이었다.
한 가정의 아버지나 엄마가 알콜 중독자가 되면 그로 인해 다른 가족들이 상처를 받게 되고 이것이 상한 감정(Damaged Emotion)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 상한 감정은 원인이었던 알콜중독이 해결되었음에도 그들 내면에 내적상처로 여전히 남아서 그들의 삶에 많은 나쁜 영향과 갈등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2. [기독교 연구소]에서 발제한 학자들의 제 입장
숭실대학교 기독교 문화연구소 곽신환 소장은 “목회자가 먼저 하나님의 치유를 깊이 체험하고 이를 토대로 가정, 교회, 지역사회, 국가가 치유돼야 한다”며 목회자 자신과 더불어 목회 현장에서의 치유가 통전적으로 건강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김회권 교수는 “구약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은 병든 피조물을 치료하시는 의사요, 깨어진 관계성을 회복하시는 위대한 치유자”라며 “하나님께서는 원래 목적하신 충만한 건강상태인 샬롬(shalom)의 상태로 개인의 몸과 영혼, 가정, 공동체, 국가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정정숙 교수는 “치유상담은 인간이 안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둔다”며 “치유상담의 영역은 영적 치유, 내적 치유, 질병 치유, 사회적 치유로 분류할 수 있으며, 치유는 어느 한 부분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서인선 교수는 “목회 현장에서 성경과 역사, 신학에 기반을 두고 치유사역을 감당할 것”을 주문하며 “노력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치유받는 것이 아니라 치유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 내적 상처에 대한 제 학자들의 정의
“내적 상처”는 데이빗 씨멘즈(David A. Seamands)가 말한 “상한 감정”(Damaged Emotion) 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 가졌던 상한 감정이 내면 속에 남아서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성인이 되어서도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내적 상처에 대한 치유와 회복에 대한 연구와 이론들이 생겨나고 심리학이나 기독교적 상담 및 치유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은 많은 분이 배우고 또한 목회에도 적용하면서 내적 상처치유가 보편화 되어지게 목회에서도 “치유 목회”란 분야도 생기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죄와 허물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며,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가는 것이 기독교의 중요한 사역임을 생각할 때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치유 사역은 성도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역이 되어야 한다. 특히, 오늘날 점점 이혼율이 높아 깨어진 가정(Broken family)가 수없이 늘어나고 있다.
바울이 디모데후서 3:1-5에서 경고한 것처럼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고 했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정말 치유 사역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중요한 때다. 하지만 아직도 목회가 기존 신자나 중요 멤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삭개오나 수가성 우물가 여인, 또는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있던 중풍 병자,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나면서 앉은뱅이와 같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고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거나 들어와도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세상으로 보내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더군다나 교회 안에 내적 상처 가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목회자들이 이들에 대한 관심, 이해, 목회적 방안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들을 향한 치유사역은 시도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과거에 발생했던 좋지 못한 사건의 기억이나 어린 시절에 우리가 당한 상처혹은 과거에 지은 특정한 죄 등이 감정적 혹은 정신적인 병의 원인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적 치유”를 “과거의 상처의 치유”(Healing of Past Hurts)혹은 “깊은 차원의 치유” 또는 “기억의 치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쓰라린 과거 기억을 포함한 정서적 심리적인 상처들은 우리 자신이 저지른 죄악 또는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생기게 된다. 이러한 과거 상처들은 상처가진 사람의 내면에 자리 잡아서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면 속사람(Inner Man)이 과거의 감정의 노예로부터 해방되고 회복된다. 따라서 과거에 받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신체적이고도 가시적인 치유와 축사 사역과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으나 분명하게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일반적으로 내적 치유(Inner Healing)라고 불리고 있다.
데이빗 씨멘즈(David A. Seamands)는 “내적 치유란 상처받은 감정과 치유되지 못한 기억들을 목회 적인 차원에서 돌보아 주고 그 치유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내적 치유에 대해 “성령의 치유 능력을 특정한 형태의 감정적 영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기독교 상담과 치유 기도의 한 가지 형태다. 내적 치유 사역은 그러한 사역 중 하나의 사역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사역의 유일한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지나친 강조는 과장과 오용을 낳기 때문이다”이라고 했다.
그 분야의 또 다른 선구자인 존(John)과 폴라 센포드(Paula Sandford)는 『“The Transformation of the Inner Man』에서, “내적 치유 사역은 속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속사람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사역”으로 이해하고 있다.
베티 탭스코트(Betty Tapscott)는 내적 치유은 “내적 치유는 속사람 즉 마음, 감정, 괴로운 기억, 꿈 등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기도를 통한 과정으로서 그것을 통해 우리는 원망, 자기 부정, 자기 동정, 우울, 죄책감, 두려움, 슬픔, 미움, 열등감, 정죄, 무가치 등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다 하고 하였다.
내적 치유의 권위자인 찰스 H. 크래프트(Charles H. Craft)는 “내적 치유 사역은 전인적인 치유를 목적으로 하여 성령의 능력을 통한 사역이다. 인간의 질병은 대체로 감정적, 영적인 부분에 입은 상처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내적 치유는 그곳에 초점을 맞춘다. 이 사역은 그러한 상처의 근원이 되는 부분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적용하려 한다. 흔히 내담자의 기억에는 이러한 근원적인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에, 내적 치유는 때로 ‘기억의 치유’라고 불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내담자를 치유하면서 흔히 당면하게 되는 구체적 문제는 용서하지 않음, 분노, 원망, 거부, 자부심의 결여, 두려움, 걱정, 성적인 문제 등이다” 라고 하였다.
리타 베네트(Rita Bennett)는 “내적 치유란 간단히 말해서 성령의 역사를 저해하고 있는 요인들을 치유함과 동시에, 그것들을 우리의 심리적인 본성으로부터 제거해 버리는 일을 주님과 협력하여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능력 전도자요 치유사역자인 존 윔버(John Wimber)는 “내적 치유란 손상된 감정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죄와 용서와 정서적인 회복을 이루어 주시는 과정으로서, 곤경에 빠져있는 우리의 존재와 삶의 영역에 복음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적 치유는 속사람의 치유로서 정신(Mind), 의지(Will), 마음(Heart)과 관련된 모든 부분의 영역의 치유를 포함한다. 또한 우리의 감정(Emotions), 영혼(Psyche, Soul or Spirit)과 관련된 부분의 영역의 치유도 포함한다. 한편 영적인 병은 우리가 행한 것에 의해 기인하지만, 감정적인 병은 우리가 당한 것 혹은 일어난 사건에 의해 발생한다. 즉 과거에 우리가 이러한 상처는 나쁜 추억 혹은 연약한 혹은 상처받은 감정의 형태로서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이러한 과거의 깊은 상처는 우리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문제 가운데로 몰아넣기에 내적 치유가 요청된다.
4. 치유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원리
치유는 질병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긴 용어이다. 그렇다면 질병은 무엇인가? 웹스터 의학 사전에 따르면, 질병을 '평온함이 결여된 상태' 또는 '건강의 부조리를 경험하는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질병은 선천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의 혼합적 상태이며, 하나님의 법과 자연의 법에 순종치 아니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질병은 인간의 구성요소들인 영과 육의 부조화와 분열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가 부조리를 이루는 상태이다.
이것은 신체적 정신적 영적 및 사회적 질서가 정상상태에서 비정상상태로 이탈된 상태를 말한다. 즉, 질병이란 자아와 이웃과 환경, 자연과 하나님이 부조화를 이룬 상태이며, 따라서 질병을 육체적 질병과 정신적 질병, 영적 질병, 환경적 질병으로 구분을 할 수가 있다.
구약에서는 치유의 단어로 ‘라파'가 있다. 이는 “고치다, 온전케 하다, 치료하다, 본래 상태로 회복시키다, 용서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루카'가 있다. 이는 “의사가 상처를 고치기 위해 사용하는 긴 붕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마페'가 있다. 이는 “치료하다, 고치다”라는 뜻과 “몸과 마음의 양약, 재앙에서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이를 종합하면 '마페'는 “싸매고 치료하여 온전케 하는, 회복시킨다”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약에서 사용되는 치유의 단어로 '야시스'있다. 이는 “병중에 고통을 당하다가 낫는다, 병든 자를 고친다, 마음의 약한 것을 회복시킨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데랴표', '휘기아이 아이모', '소조' 등이 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치료하다, 회복시키다, 보존하다, 상하지 않게 하다, 좋은 건강상태에 있게하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치유라는 뜻은 “게 온전한 상태로 조화된 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것”을 일컫는다.
성경은 치유에 대한 근거와 많은 사례들을 보여준다. 성경은 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반역의 인간들, 병들고 상처 입은 인간들을 부르시고 구속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병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가진 의사이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치유는 “하나님의 치유역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왕 되신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역사”이다.
마태복음 9장 35절에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 선포”와 “영육 치유”와 “제자 양육” 등 3대 사역을 감당하셨다. 특히,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서 메시아이심을 증거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치유하실 때마다 그 동기가 사랑이었다. 치유 사역에 임하실 때, 그분의 마음은 늘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셨다”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이것은 바로 치유 사역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이 반듯이 갖추어야 한 기본 마음과 자세이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의 특징은 전인 치유이다. 단순히 육신의 질병만을 고치신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질 문제인 영적인 문제를 근본 치유하셨다 죄로 인한 영육의 문제, 진인적 구원, 치유를 하셨다.
예수님의 치유방법은 다양하다. 예수님은 환자의 형편과 주변 환경에 맞추어서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하셨다. 또한 항상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시고 치유 사역에 임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귀신을 쫒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치유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다. 제자들은 오순절의 체험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았고 복음 전파를 하면서 치유 사역을 능히 감당하였다.
예수님 제자들의 치유 사역에는 몇가지 원리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제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치유 사역을 감당했다. 제자들의 치유 동기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섬김과 사랑에서 출발했다. 둘째로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치유를 사역에 임했다. 셋째로 제자들은 치유를 선교의 도구로 사용했다.
■내적 상한 감정의 치유에 대한 성경적 일례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5:2-9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내 자리를 들고 걸러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오늘 이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매력 있는 말 중 하나는 행운이란 단어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 행운만 자신이 얻을 수 있다면 내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 될 것이다’라고 생각을 한다. 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은 내가 행운을 얻지 못했지 때문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를 바라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보다 이 행운을 얻기를 바라고, 행운을 얻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행운을 누군가가 먼저 빼앗아 가서 자기가 얻지 못하니 다른 이들을 원망한다.
이 본문 말씀은 오늘날 현대인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문제를 안고 있다. 질병의 문제일 수 있고 인생문제, 가정문제, 자녀문제, 대인관계 문제 등 누구나 나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들을 그들 스스로 풀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만약 행운을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이 말씀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일 수 있다.
<예수님의 질문: 낫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는가?>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찾아오셔서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되어 가능성이 없음을 아셨다. 38년 동안 앓았으니 어찌 보면 한평생 병을 앓아왔는지 모른다. 그 형편과 상태야 한 눈에 알아볼 정도였으리라 사료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도전하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어찌 보면 답을 다 알고 계시면서 이렇게 물으셨다.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모든 것을 꿰뚫어 아시는 예수님이 왜 이렇게 물으셨을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이유는 바로 이 병자의 답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병자는 예수님께 대답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내려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병자들이 예루살렘 양문 길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행각 다섯이 있었다. 그 행각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누워 기다렸던 것은 물의 동함을 기다렸던 것이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믿음이 미신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간절했다. 지금의 우리가 생각할 때는 미신에 목숨 거는 것 같아도 그 당시 상황에서 그들의 형편을 본다면 이해될 수 있다. 그들에게 다른 소망은 없었다. 소외된 자들로 의사를 찾아가 치료받은 능력도 없고 다른 소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이 동하는 그것만 바라보고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기다렸다.
<치료받아야 할 마음의 상처를 가진 인생>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서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렸던 사람들….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가정문제, 부부문제, 자녀문제, 죄악의 문제, 사업문제, 인간관계 갈등 문제 등 사람들 마다 문제를 안고 그것을 해결할 소망도 없이 막연히 낫기를 바라고 있다.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는 행운을 얻으면 자신이 어떤 문제가 있던지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그들의 관심이다. 문제는 그 행운을 얻기가 하늘의 별 따는 것처럼 어렵다는 것이다. 미신적이든 아니든 상관은 없다. 그 행운을 자기가 얻기 바랄 뿐이다.
문제는 물이 동할 때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자기가 내려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에 먼저 내려간다는 한탄과 원망이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 그 행운을 자기가 차지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 간단한 본문에서 인생들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면 내가 행운을 얻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내가 특별한 그 자(Special Somebody)가 된다는 것이다.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에게 원망한다.
필자 만나 본 많은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관심 갖게 된 것이 내면 속에 상한 감정(Damaged Emotion)이란 것이다.
데이빗 A. 씨멘즈 목사님이 쓴 책 『상한 감정의 치유』에 보면, “상한 감정”이란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라면서 경험했던 인간관계 속에서 경험한 상처는 내면속에 “상한 감정(Damaged Emotion)”으로 자리잡게 되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는 내 경험이나 가족이나 친구, 사회 등으로부터 나의 자아상을 형성, 자기 자신도 갈등을 갖고 과거 경험에서 상처를 받으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줌, 부정적 자아상으로 세상을 봄, 자기 내면 속의 상처가 자기 나름의 행동을 유발.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오면서 가지고 있던 인간관계에서 얻은 과거의 경험들에 의해 자아상 (Self-Image)을 형성하게 된다. 이 자아상은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고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사람의 인격과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인격과 생각은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이 행동은 그 사람의 삶 자체를 이루게 된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사람은 누구나 인간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부모, 형제, 선생님, 친구, 교회, 학교, 이웃들, 또래집단, 사회 속에서 인간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 경험은 우리 자신의 자아상 (Self-Image)을 형성하게 된다.
좋은 경험을 하게 되면 건전한 자아상(Healthy Self-Image)을 형성하게 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받고, 좋은 평가와 대접을 받으면 긍정적이고 건전한 자아상(Healthy self-image)을 형성한다. 이런 사람은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적극적이고 어떤 어려움에도 도전하여 극복해가는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어릴 때 가정과 학교, 교회, 사회 속에서 가졌던 인간관계 속에서 나쁜 경험을하면 자아상은 Ugly Self-Image(건전하지 못한 자아상)을 갖게 된다. 이런 Ugly Self-Image를 가지면 내면 속에 자리 잡아서 부정적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무엇보다 상처를 받으면 이 상처는 내면 속에 건전하지 못한 자아상을 형성한다. 건전하지 못한 자아상을 가지면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니 문제 있는 행동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열등감, 지나친 죄책감, 자기 비하 또는 자기 과시, 완전주의, 지나친 허영, 우울감 등 갖가지의 부정적 행동을 하게 된다. 내면의 상처는 계속해서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상처받은 감정으로 인해 건전하지 못한 자아상을 가지면 갈등과 상처를 갖고 살아간다. 자기 자신도 상처와 갈등을 가지고 살아 갈 뿐 아니라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삶을 살게 된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자신보다 약자 입장인 사람들-배우자나 자녀들, 부모나 형제들, 가까운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한다.
이런 상처는 준 사람 내면에 다시 상한 감정을 갖게 하여 상처로 자리잡아 건전하지 못한 자아상을 갖게 하여 자녀에게 이어지는 악순환으로 계속 작용한다. 이것을 용어적으로 “내면적 속박(Codependency)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이것은 물건이나 행동에 대한 거의 강박적인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알콜중독, 식욕감퇴증, 이상 식욕 항진증, 지나친 성 탐닉, 습관적 격분, 일 중독, 낭비하고 싶은 방비 충동, 극단적이고 율법적인 완벽주의, 수십 번 씻으려는 결벽적 충동 등이다. 이러한 내면 속박은 인간을 육신적으로는 정상이나 비정상적으로 살게 만든다.
히브리서 12:15에는 “쓴뿌리”라고 언급되어 있다. “너희는 하나님에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바로 이 쓴 뿌리가 “내적 상처”라 할 수 있다. 이런 쓴 뿌리가 생기면 자기도 괴롭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했다. 자신도 이 쓴뿌리로 인해 괴롭고 힘든 인생을 살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괴롭혀 결국 다른 사람들의 인생도 더럽고 불행하게 만든다.
우리의 인생이 불행해지고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행운을 얻지 못해서가 아니닙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 상처 즉 쓴 뿌리 때문이요 그 상처를 치유해 줄 예수를 못 만났기 때문이다.
<치료자가 되는 예수를 바라보는가?>
예수님이 38년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신을 치유해줄 예수님이 앞에 있는데도 여전히 물이 동하기만 기다리며 바라보는 병자는 오늘날 자신을 구원하고 칭유해줄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문제는 교회에 나왔지만 여전히 세상 행운에만 관심 있고 예수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 아직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거의 그런 사람들이다. 상한 감정이 예수를 보지 못하게 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은 나를 도와주지 않은 부모 탓이다” “이가 이렇게 불행한 것은 아내(남편) 탓이다”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려 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한다. 내적 상처가 보는 눈과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변하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고 불평하기만한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며 자기 비하적이다.
히브리서12:1-2은 이렇게 말씀해 주신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내적 상처로 인해 무거운 인생의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와 허물들…나도 내 가정의 아내(남편)과 자녀들도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인생을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주요, 여러분을 을 치유해 줄 예수 그분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다. 무엇이 여러분의 인생을 얽어매는가?
예수 그분이 나를 구원하고 치유해서 새사람, 새인생, 새생활을 하게 하실 분은 예수 밖에 없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은 예수 밖에는 나를 치료하고 구원할 분은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진정 치유 받아 나아서 새인생을 걸어가게 하실 분은 예수뿐 이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요5:8-9)
어떻게 여러분이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있나?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을 병들게 하며 불구자로 만들었던 내면의 상처로부터 치유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을 통해 배워본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에게 명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왜 예수님은 38년이나 병으로 앓아 누워있던 환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을까? 손을 얹고 기도해 주어 낫게 하던지 직접 치유해 주지 않고 말씀으로 명하셨을까? 여기에 진리가 있다. 너의 인생을 누워서 그렇게 세월만 허비하고 있을 수 없지않는가? 그에게 예수님은 도전하셨다. “네 인생은 네가 일어나야 한다. 네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야 한다. 네 인생은 네가 들고 일어나야 하고 걸어가야 한다”라고 도전하시는 것이다.
1. 신앙에로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
내면적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부정적 자아상을 갖게 됨으로 모든 것을 [부정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보게 된다. 그 결과 절망과 좌절을 하게 되고 문제를 당할 때 도전하여 극복하기 보다 주저앉아 자포 자기하거나 도피하는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은 그 문제를 아셨기에 그에게 새로운 신앙을 갖고 도전할 것을 명하신다. 자포자기나 도피는 인생을 더 누워있게 만든다. 예수님은 “일어나라” 명하신다. 고침 받기 위해 도전해야 한다. 예수께서 도우실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고침 받고자 도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고침 받을 수가 없다.
2. 내재 된 문제점을 바로 알고 고치도록 힘써야 한다.
히브리서 12:12-13에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말씀하셨다.
자신을 주춤거리게 하고 어그러진 인생길을 걸어가게 했던 자신의 내면 안의 상처와 어그러진 자아상은 저절로 고쳐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나를 치료해 주신다고 해도 내 자신의 잘못된 것과
어그러진 것은 내가 고치도록 훈련하여 변화시켜 가야 한다. 내 안에 부정적인 생각, 인간관계 속에서 갈등과 상처를 일으키는 내 태도와 내면의 감정 등 내가 구체적으로 고치도록 훈련하고 변화시켜야 한다. 언어도 훈련하고 인내하는 법도 배우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 과정은 치료보다 더 많은 훈련을 해야 하고 계속 고쳐가도록 힘써야 한다.
3. 변화받아 새로운 인생길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걸어가라!”는 짧은 단어는 단지 걸어가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이제는 누워 허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길을 걸어가라는 것이다. 14절에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말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말씀하셨다.
그는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진정한 치유는 병만 고침 받는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신앙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 학교생활, 사회생활이 달라져야 한다.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야 할 새로운 인생은 무엇일까?
적용과 결론을 맺고자 한다. 여러분은 마음의 병 때문에 주저앉아 인생을 허비하고 원망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도전하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또 명하신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여러분이 걸어가야 할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여러분의 인생이요 몫이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상처가 치유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제2의 38년된 병자들이 되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