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은 내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다. 당시 아버님이 목회하시던 화정교회에서 한얼산기도원 원장이신 이천석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 집회가 열렸다. 나는 이번 기회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를 보여 주시면 아버님을 이어 목회를 할 것이고, 안 보여 주시면 다른 길로 가겠다는 각오를 했다. 내게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으므로 여러 날을 철야와 금식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때 하나님은 내게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게 하셨고, 확신 속에서 아버님의 인도로 성결교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 수업을 받게 되었다.
1974년 11월 31일, 나는 첫 목회지로 강경지방 성민교회(현재는 성동제일교회)에 부임하였다. 첫 예배에 네 가정이 모였는데, 모두 합해서 13명이었다. 우리는 은혜롭고 가슴 뜨거운 예배를 드렸다. 사과 궤짝으로 만든 강대상에, 비바람에 무너져 내린 교회 벽은 흰 모조지를 붙여 임시로 찬바람을 막고 있었다. 그뿐인가! 교회 종은 교회 밖에 있는 나무에 산소통을 매달아 사용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농촌 교회에서의 길지 않은 목회 사역이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도 뚜렷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 중 특별히 기억나는 성도는 송신국 권사님이시다. 당시 연세가 87세로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일에 가장 모범을 보이셨다. 꼭 하루에 한번 이상 사택에 찾아와 방은 따뜻한지 살피셨던 정이 많은 귀한 권사님이셨다. 교회가 언덕에 있다 보니 겨울엔 눈 덮인 길을 걸어오셔야 했는데 그 바람에 많이 넘어지기도 하셨다.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일으켜드리기 위해 손을 내밀면 '아이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언제나 감사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야말로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소유한 참 신앙인이셨다. 얼마 안 되는 성도들이 매주 돌아가면서 기도를 인도하였는데, 송 권사님의 기도에는 "하나님, 우리 성민교회에 어린 종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내용이 거의 빠짐없이 들어갔다.
송 권사님이 나를 어린 종으로 부른 이유는 아마도 21살의 전도사인 내가 무척 어리게 보이셨던 모양이다. 또한 젊은 목회자가 농촌의 어려운 교회를 맡아 사역하는 것이 무척이나 좋으셨던 나머지 기도하실 때마다 그렇게 표현하신 거 같다. 난 속으로 ‘내가 어린 종이면 우리 아버지는 늙은 종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웃기도 했다. 어쨌든 나도 언젠가는 늙은 종이라는 말을 듣게 될 텐데 부지런히 목회를 해야 겠다고 다짐하곤 했었다.
권사님의 기도의 참뜻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목회 현장에서 은퇴를 하고 나니 훌쩍 지나간 세월이 매우 아쉽다. 지금의 내 모습을 권사님이 보신다면 여전히 권사님 눈에 어린 종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 시절 듣던 '어린 종' 이란 말이 그리울 뿐이다. 오직 하나님 중심에 서서 믿음 생활을 해 오신 송 권사님이 무척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