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대를 이어오는 가문: 3명의 순교자와 3명의 산 순교자를 낸 이동하 면장 가문

이대희목사, 장신대신대원과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 [가정을 세우는 남편의 기도]외에 300여권 이상 기독교 관련 서적을 집필했다.이대희목사는 신앙의 대를 이어온 가문이다. 1대(이동하면장), 2대(이상휘, 이리신광개척, 초대장로), 3대(이대희목사, 예장통합).
이대희목사, 장신대신대원과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 [가정을 세우는 남편의 기도]외에 300여권 이상 기독교 관련 서적을 집필했다.이대희목사는 신앙의 대를 이어온 가문이다. 1대(이동하면장), 2대(이상휘, 이리신광개척, 초대장로), 3대(이대희목사, 예장통합).

한국교회가 갈수록 심각하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생각한 것 보다 내부적으로는 더 심각하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암담하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읽기 위해서는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할까? 먼저 과거의 한국교회 역사를 되돌아 보는 것이 우선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미래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과거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미래는 희망이 없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잠깐 다시 되돌려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국교회 부흥의 정점 : 1990-2000"

한국교회가 부흥의 정점을 이루었던 시기는 1990-2000년대였다. 이 후부터 한국교회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이 시기에 부흥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가장 복음화 율이 높은 한국의 지역은 어디일까? 그곳은 전북 익산시이다. 34%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익산은 원불교 본산이다. 그런데 이곳이 기독교 인구가 가장 높은 지역이라는 것은 어려운 지역에서 복음이 더 번성 한 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난과 박해와 어려운 환경이 신앙을 더 돈독하게 한다. 익산은 원불교총본부, 원광대학교, 미룩사지등등 불교 취향이 젖어있는 그 땅에서 어떻게 그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까? 그 땅이 지금 남한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민중 35%로 익산이 가장 많은 지역인 것이다.

 이지역이 이렇게 많아지게 된 이유들 중에 하나는 이리신광교회와 같은 교회가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고 인정받는 공동체로 일찍이 뿌리를 내려 유익을 끼쳤기 때문이다. 1970년대 한창 부흥할 즈음에 익산 신광교회를 담임하셨던 총회장을 지낸 고 안경운 목사님의 영향력이 컸다. 한경직 목사님과 같이 익산에서는 성자로 불리어진 목사님의 인품과 영향력이 지금 이리신광교회를 부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익산의 목회자 협의회 임원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익산은 다른 지역과 다르게 교단을 떠나서 교회가 어려우면 익산지역 교회가 합심하면 문제를 풀어 냈고, 이단 사이비에 교회가 넘어가는 것을 해결했다고 한다. 이런 요인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익산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교회를 들라면 이리신광교회였다.

"익산신광교회 : 이상휘 장로 분립 개척" 

지금은 7-8천명의 교회로 성장했다. 물론 지역에서 당시에도 가장 큰 교회였다. 이리신광교회는 1946년 익산 창인동에 위치해 있던 긴 역사를 가진 교회를 떠나 78년이 지난 2008년 10월 마동에 새롭게 자리잡었다. 신광교회는 1만 5천 평의 넓은 대지에 파란 잔디밭 축구경기장을 중앙에 두고 ㄷ자 형태로 구성된 입면이 하나의 불럭을 차지한 아름다운 교회로 건축되었다.

여기에는 의미 있는 한 역사적 사건이 숨어 있다. ( 전영철 저, "믿음. 그 위대한 우산을 찾아서 2"(선교횃불), 2015).

이상휘 장로와 45명의 성도가 이리신광교회 개척 분립하여 예배드리는 주일예배 때 사용한 1호 주보자료.
이상휘 장로와 45명의 성도가 이리신광교회 개척 분립하여 예배드리는 주일예배 때 사용한 1호 주보자료.

이리신광교회를 개척의 씨를 뿌린 한 평신도가 있었다. 그는 이미 50년전에 고인이 되셨다. 그는 당시 고현교회 이상휘 장로다. 그는 45명 교인과 이리신광교회를 1946. 05. 07에 개척분립예배 드렸다 (신사 참배 결의 반대로 인한 갈등으로 교회분립이 추측된다).

 그 근거로 1944년 2년전에 이상태 안수집사 (당시 이상휘장로 동생)가 총회 신사참배 결의에 반대시위하다 일본순사에 잡혀 서대문형무소 수감후 수형생활에서 결핵환자 돌보다 결핵에 걸려 1년옥고를 치룬 후 순교했다. (1943년 8월 10일에 소천) 아마 이것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여동생 이상임은 오빠 이상태 집사의 순교소식을 듣고 신학을 공부하여 전도사가 되었다. 미국 유학을 하여 공부를 마친후에 교회 전도사. 군산 개정병원사감, 전주기전여자대학 사감, 1963 - 1967 (28-32회) 예장 여전도전국연합회 총무 (4대)로 봉직하면서 한국교회 여성운동의 지도자로 일하면서 평생 주의 일에 전념하다가  암으로 소천했다.

또 하나 동생이었던 이상해는 무형교회 전도사로 교회를 담임하다가 6.25가 발발하면서 1950. 8 대한청년단으로 활동하면서
 지역민과 청년계몽 운동과 공산주의 비판을 구실로 체포 1순위로 잡아갔다
1953. 8. 14에 공산당에 의해 아들 이은희와 성동내무서에서 총살당함으로 순교했다. 결국 모든 형제가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과 순교로 짦은 생을 살았다.

 ( 참고. 전영철, "믿음 그 위대한 유산을 찾아서 2", 선교횃불. 2015. pp.291-324 ( 3명의 순교자와 3명의 산 순교자를 낸 이동하 면장. 이상해 전도사 가문).

"이상휘 장로 전재산 팔아 헌납하여 7천여평 교회 부지 매입하여 교회 세우는데 헌신"

동생의 순교등으로 고뇌하던 맡형이었던 이상휘장로는 전재산을 팔아 약 7천여평 교회 부지를 이리의 중앙에 사서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했다. 본인은 집도 없이 사택에서 생활했다. 그런 희생이 지금의 이리신광교회를 이루었고 익산복음화의 뿌리가 되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상휘장로의 이런 행동은 아마 동생의 순교에 대한 고뇌로 자신도 가난의 순교로 결단한 것으로 보인다. 자녀와 후손에게는 믿음만 남기고 재산은 무일푼을 남겼다. 10년후에 개척한 교회를 사임하고 강원도 양구로 멀리 떠났고 양구장로교회 초대장로로 역시 교회를 섬기다가 지병으로 소천하셨다 . 어쩌면 교회를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 생각해던 것으로 보인다. 신광교회 부흥을 위해 초대장로인 자신이 자칫 걸림돌이 될수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 이후에 안경운 목사 ( 예장 통합 총회장 역임) 가 부임하여 목회를 훌륭하게 감당하시고 그 역시 일찍 소천하셨다.

두 동생의 순교를 보면서 자신도 복음을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살았던 한국교회 부흥시기에 있었던 한 평신도의 숨은 이야기다.

지금은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로 성장한 이리신광교회가 대형교회의 전철을 밟지 말고 한 평신도가 가졌던 초심의 신앙과 헌신의 정신과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칭찬 받는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하기를 기도한다.

한국교회는 평신도의 이런 헌신과 순교가 있었기에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지금 이리신광교회도 이런 한알의 밀알이 죽어서 지금의 교회를 이루었다. 그런 곳에서 한국에서 가장 복음화 율이 높은 곳이 익산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믿는다.

필자(이대희목사, 통합측)는 그런 선진들의 교회를 사랑하는 헌신과 신앙의 결단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고 부끄러울뿐이다. 선진들이 이룬 이런 역사를 살펴 보면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신앙을 전수하고 다음세대에 이어갈 것인가를 깊게 고민해야 할것이다 . 앞으로 남은 10년의 골든타임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마지막 기회일수 있다고 보면 그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교회는 사람이다. 평신도가 답이다. 복음에 헌신된 평신도를 키워 내는 일이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비록 숫자는 적더라도,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를 키우는 일에 마지막까지 힘을 다한 것처럼 지금도 이 일만이 우리가 집중해야 할일이다.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예수님의 방법은 가장 좋은 한국교회의 최고의 대안이며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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