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예배로 이끌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예배를 명하신다.”

김대운 목사(수원경성교회, 예장 합동)
김대운 목사(수원경성교회, 예장 합동)

코로나가 발발하자마자 진보적인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비대면 예배를 전염병 시대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성경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였으나 그들이 제시한 근거는 너무도 빈약하였고 오류와 모순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전염병과 예배에 대한 두 번째 주제는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올바른 예배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4장을 살펴본 뒤, 로마서 12장과 호세아 6장의 순서로 연재가 됩니다.

 

 

1. 요한복음 4:20-26

비대면예배 찬성론자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예배의 장소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이 거기에 있을까요? 아닙니다. 본문의 핵심은 예배의 장소나 형식이 아닌 예배의 대상과 예배의 조건에 있습니다.

주님은 예배의 장소를 중요하게 보던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의 관심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예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 “하나님의 영이시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예배에 있어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안이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라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성전 제사가 예표하던 그리스도,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궁극적으로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배의 조건으로 신령과 진정으로를 제시하였습니다. 신령은 헬라어로 프뉴마로 성령으로도 번역되고 사람의 영으로도 번역됩니다. 진정은 진리로 번역이 됩니다. 성령으로 번역한다면 성령의 조명을 통한 진리의 말씀 안에서의 예배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영으로 번역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적으로 살아남, 거듭남이 예배의 필수적 조건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영이 죽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니고데모처럼 도무지 주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고 예배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 영이 살아난 사람,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거듭난 사람들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성령과 진리로 번역하든, 사람의 영과 진리로 번역하든 본문은 예배의 대상과 예배의 조건을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이 예배의 장소가 아닌 예배의 대상과 조건이라는 사실을 전제할 때 과연 비대면예배 찬성론자들의 주장처럼 예배의 장소나 형식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니요.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 하나님을 생각할 때 결코 그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시편 66:1-2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찌어다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찌어다.”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 이름을 영화롭게 찬송하는 일에 있어서 장소나 형식이 정말 중요하지 않을까요?

에드먼드 클라우니 교수님은 그의 교회론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예배를 이끌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예배를 명령한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에 불타는 열심을 가지고 계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교회론의 9장 교회의 예배에서 참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의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시고 그분이 계시하신 뜻에 의하여 제한된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강조하였습니다. 예배의 요소들에 대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없는 요소는 배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칼빈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뛰어넘어서 교회가 예배를 위한 규정을 만들 권세가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제공하신 것 이상의 새로운 요소를 도입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특히 공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의 제단에서 취하지 않은 불로 분향함으로써 율법을 범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를 심판하신 사실을 자주 상기시켰습니다.

이러한 예배의 규정적 원리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쌔”, 초대교회의 예배는 떡을 뗌과 강론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여기서 떡을 뗌은 이들이 스스로 창안한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주께서 유월절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이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떡을 떼시고 잔을 나누시면서 주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죠? 사도들은 바로 이 명령에 따라서 떡을 떼고 주님의 가르침을 강론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는 당시 교회의 예배에 들어온 이교도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바울의 노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 여인들의 가르침의 문제, 방언과 예언의 문제, 성찬의 문제 등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갖고 있던 이교도적 요소들을 교정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AD 165년에 기록된 순교자 저스틴의 첫 번째 변증문은 당시 로마지역에서 행해지던 예배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이라 불리는 날에 한 장소에서 도시나 농촌에 서는 사람의 집회가 있는데, 거기서는 사도들의 언행록(사도들이 기록한 신약성경)이나 예언자들(선지서, 구약성경)의 글이 시간이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낭독됩니다. 낭독자들의 낭독이 끝나면 그 집회의 인도자는 강론을 통하여 고귀한 일을 본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모두 함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오고 인도자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힘있게 기도와 감사를 드리며 회중은 아멘으로써 화답합니다.”

저스틴의 변증서는 당시 교회의 예배가 바울이 사도행전 20장에서 묘사한 예배와 일치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강론과 떡 뗌이 초대교회가 갖고 있던 예배의 형식이었습니다. 서울신학대학교 조기연 교수님은 2014년에 열렸던 신촌 포럼에서 예배의 형식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명제 하에 예배의 구조나 형식을 바꾸려 한다면 우리는 먼저 기존 예배의 구조와 형식 속에 들어있는 예배의 신학 즉 예배의 본질을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기존의 예배에 있는 문제점을 개선하거나 보완하는 방향으로 예배의 변형을 꾀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조교수님은 이천년의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예배의 개혁이나 변화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백 년에 걸쳐서 조금씩 이뤄졌으며, 거기에는 많은 신학적 토론과 깊이 있는 연구가 수반되었다면서 작금의 한국 땅에서 진행되는 급진적이고 산발적으로 행해지는 예배의 변화들은 대부분 신학적으로 부실하거나 잘못된 영성으로 이끌 위험성이 큰 것들이며 이러한 예배의 개혁은 사람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받을수록 그 폐해가 커진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갑작스러운 예배의 변화는 심도 있는 연구의 결과입니까? 얼마나 심도 있는 연구의 결과입니까? 로마 천주교의 예배가 왜 타락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예배에는 왜 온갖 비성경적인 요소들로 가득 채워지게 되었을까요? 심지어 그들은 예배를 미사(제사)로 완전히 다른 성격의 종교 행위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미 모든 대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천상에 앉아계신 그리스도를 끌어내려 자신들의 제단에서 매번 죽이는 제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의 영원한 효력을 부인하며 그를 반복하여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 후 남은 떡은 성체 조배실이라는 구별된 공간에 두어 신자들이 경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의 예배가 이렇게 처음부터 타락했을까요? 아닙니다. 이방 종교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나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라 성경이 명령하지 않거나 허락하지 않은 예배의 요소들을 단호히 거부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에는 글을 모르는 성도들을 위한 사랑과 배려의 차원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형상을 만들었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아 마리아에게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아닌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공덕을 의지하도록 만들었으며 성경이 아닌 교황의 입에 더 주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런 예배의 타락을 교정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예배의 요소 안에 이미 신론과 기독록, 구원론과 인간론, 교회론과 같은 신학의 제반 요소들이 녹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히 로마 천주교의 예배를 반대하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근거를 찾는 예배, 삼위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예배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칼빈은 율법의 규정을 따라서 회중 찬송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원리를 따라서 예배 순서를 정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이 왜 핍박을 받았습니까?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국교도의 예배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동기도서를 예배에 사용하라는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예배에 참석하기보다 그들의 모든 재산과 생명까지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 교수님은 교회론에서 우리의 예배가 우주적인 예배요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를 가리키는 히브리아 카알이나 헬라어 에클레시아나 모두 실제로 모여 있는 무리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집은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집의 문으로 소집하기 위하여 두 개의 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하나님의 회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만 있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천군 천사도 함께 있었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모으실 때 하나님은 수천의 천사들과 함께 하셨습니다(33:2-3, 68:17).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고 말했습니다(12:22).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회중으로 올 때 주님 역시 성령에 의하여 우리 회중에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예배로 이끌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예배를 명하십니다.

그런데 회중으로 모이지 않는 비대면예배가 예배일까요? 예배라는 이름만 붙이면 예배가 될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성경의 명령이 아닌 정부가 정해준 방식의 예배라는 점에서 치명적 결함이 있습니다. 방역 당국은 계속해서 교회에 예배의 방식을 정해주었습니다. 성가대 금지, 찬송 금지, 암송행위 금지(사도신경, 주기도문, 교독문), 현장 예배 금지까지 명령하였습니다.

우리의 예배를 누가 명령합니까? 정부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영상을 보는 것은 회중 가운데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영상을 보고 기도하며 경배하는 행위는 결국 21세기의 형상인 영상 앞에 절하는 우상숭배라는 사실은 왜 간파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래도 하나님은 예배의 형식을 중요하게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얼마나 경솔한 말인지 모릅니다. 사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영상을 보고 예배드리는 교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음번 시간에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측 교회생활 바른 용어집에서도 영상예배를 예배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에 갑자기 이 영상예배가 뉴노멀, 시대에 따라 새롭게 떠오르는 표준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표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까요? 그리니치 표준시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나요? 해발고도의 표준인 평균 해수면이 시대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나요? 우리의 표준은 현시대가 아닌 성경입니다. 성경의 규정적 원리에 따라 예배를 드림이 요한복음 4장이 명령하는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진정한 예배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듭난 자들이 드리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 이 땅의 가시적 교회가 아닌 하늘 총회에 속한 자들이 드리는 영광스러운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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