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60)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72)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19:103).

전염병이 만연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은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창조와 혼돈이 혼재된 세상에서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빛을 구별하고 빛의 세계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음미하며 빛의 삶으로 살아가는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오미크론 하루 확진자가 35만 명이 되고 또 어린이 면역 주사 접종을 권유하는 상태가 되었다. 우리는 좀 더 조심하며 세상의 풍조와 위협에 유의하며 기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오늘 시편 말씀(토라)시편 11996-112(,)절은 말씀의 암송을 통해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고백한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아하브티)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하티)”(97).

말씀을 사랑함으로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읊조리며 살아가는 나날들! 이 말씀의 삶이야말로 우리의 행복한 삶이요 말씀의 맛이 꿀보다 단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103). 그래서 원수보다 지혜롭고 모든 스승보다 명철하며 노인보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적의 모략과 책략, 덫과 웅덩이가 무용지물처럼 되고 염탐꾼과 정탐꾼이 다가와서 감동을 받고 자기 인생을 다시 생각하며 더 이상 고난의 삶을 살기 않기로 결심하고 행복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미쉬페테 지드케카)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니쉬바에티) 굳게 정하였나이다(와아카에마)”(119:106). 결국 말씀은 인생의 등불이요 빛이라고 시편기자는 고백한다. 말씀시편(토라)에서 고난의 심하고 생명의 위기가 항상 도사리고 있는 현실에서, 해하려는 올무가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 말씀 시편 기자는 고백한다. “주의 증거들(에도테이카)로 내가 영원히(레올람)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나할티) 이는 내 마음(리비)의 즐거움이(세숀) 됨이니이다”(119:111).

고난의 삶속에서도 말씀 생활이 하나님의 감사제물을 드리는 축복의 생애로 이끈다는 확신과 고백을 한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이 드리는 자원제물(니드보트)을 받으시고 주의 공의(미쉬파테이카)를 내게 가르치소서(라메데니)”(108). 결국 우리의 삶의 형질이 십진법의 궤도를 살아가더라도 말씀과 하나님의 동행으로 살아갈 때에 삶의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안위와 보호가 있는 것이다. “내가 주의 율례들(후케이카)을 영원히(레올람) 행하려고(에케브, 끝까지)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나티티)”(112). 마음을 기울일 곳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시편 말씀기자는 역설한다.

선교사들은 영적 전장에서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루이스 매컬리(1886-1945)는 윌리암 존 매켄지(1861-1895)의 약혼녀로서 조희렴 목사가 캐나다로 유학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루이스 매컬리는 심프슨(사중복음 창시자)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1900년 조선에 선교사로 도착한다. 그녀는 함경도 강원도 남부까지 전도여행을 하고 1910년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딴 마르다 윌슨 여자 신학교를 개교했다. 함흥 성진을 거쳐 원산에 정착했고 함경도 복음화의 거점이 됐다.

캐나다장로회 여선교회에서 설립한 마르다윌슨여자신하교 (원산) 오른쪽 루이스 매컬리(Louise H. McCully, 1864-1945)
캐나다장로회 여선교회에서 설립한 마르다윌슨여자신하교 (원산) 오른쪽 루이스 매컬리(Louise H. McCully, 1864-1945)

조희렴 목사는 김관식 목사를 이어서 신학교에 교장이 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교육을 하며 농촌계몽과 사회 계몽을 한다. 루이스 매컬리 교장의 주선으로 박금려(1899-1988)와 조희렴 목사가 혼인했다. 박금녀는 정신여학교와 오사카 여자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관서 교회 전도사를 지냈고, 후에 마르다 윌슨 신학교 교수 및 사감으로 재직하면서 여전도회 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이처럼 초기 성결교 운동에 루이스 매컬리 선교사는 기초돌을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는 이름 없는 수없는 선교사들의 믿음의 씨앗 위에 세워진 것을 알게 된다. 이 어려운 시대에 그분들의 노고와 선교의 손길을 기억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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