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용서)하여 주시옵고”(마6:12)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 용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놀라운 은혜와 기쁨과 감사를 누리고 살지만, 정작 삶의 자리에서 손해를 입거나, 억울함을 당하면 못견뎌하고, 결국에는 원수로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의 마음을 갖고 있으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혈압이 올라가고 맥박이 빨라지는 등 생리적 변화가 일어나서 심장 혈관 내벽에 손상을 가져옵니다. 2007년 미국 듀크대 메디컬센터 연구팀은 1985년 고엽제 남성 313명의 분노와 적대감, 우울증 등의 부정적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평가했습니다. 그 결과 부정적 감정의 정도가 가장 높은 그룹이 혈중수치가 가장 높게 나왔는데, 이 수치가 높다는 것은 심장병, 부정맥, 당뇨병 위험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분노와 심한 적대감이 심혈관에 염증을 일으키는 요인이 돼 심장병 위험을 높이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또한 분노는 지방을 많이 분비시켜 혈중 지방을 높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지방이 간에서 콜레스테롤로 전환돼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입니다. 또한 분노는 면역기능을 약화시킨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정신과 신체의 긍정적 영향을 이끌어 냅니다. 2001년 미국의 ‘로이터 헬스’에서는 “남의 잘못에 대해 원한을 품는 것보다 용서하고 잊는 감정이 건강에 더욱 좋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 보도했습니다. 미시간 홀랜드에 있는 호프 컬리지의 위트블리 박사는 다른 사람의 부당한 행동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은 71명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미국 위스콘신대 로버트 엔라이트 교수는 “용서함으로써 에너지가 생기게 되고 집중을 더 잘할 수 있으며, 마음이 편해지고 인생을 잘 보낼 수 있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용서하는 사람들이 심장병, 당뇨병에 경감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죄의 속성들은 감정과 정신과 육체에 엄청난 해악을 주지만 용서는 인체와 신앙생활에 유익을 줍니다.
⓵‘죄’란 무엇인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죄’라는 용서를 사용할 때 복수를 사용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4절의 ‘죄’(하마르티아이)는 도덕적인 죄들을 말하고, 마태복음의 ‘죄’(오페일레마타)는 경제적인 의미의 빚, 부채를 의미합니다. 왜, 이처럼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마태의 사용한 죄란 바로 빚이라는 개념이 예수님의 원래 언어적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의 대상자는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과 ‘이웃에 대한 빚’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대상자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습관이나 단어적 의미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누가는 죄를 정의하기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의 문제로 말한 것입니다.
죄 용서 청원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죄의 빚들을 지었으니, 용서하여 달라는 청원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면서 마음속에 ‘저 사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은 나를 험담하고 못살게 굴고 나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나는 저 사람으로 인해 경제적인 손실과 인격적인 상처를 받았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복수를 해야 합니다.’라는 미움과 증오심을 품고서 “하나님이여,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기도입니다. 죄를 움켜잡고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법에 절대로 다가설 수 없습니다. 죄 용서를 빌고자 한다면 자기의 죄를 먼저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나에게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먼저 용서해야, 하나님의 용서가 내 삶속에 거룩한 은혜로 임재하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용서 없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웃 사랑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웃의 죄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이것은 나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않고 살겠다는 비신앙적인 모습입니다.
②용서 없는 용서 청원은 무의미하다
질문1)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18:21)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22절)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
하나님께 속한 자녀들의 이웃 사랑은 숫자에 제한이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우리들에게 주신 고귀한 교훈이며 능력입니다.
탕자가 재산을 다 탕진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지 않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 행복하여 잔치를 열어줍니다. 아들은 너무 죄송한 마음으로 종으로 여겨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종이 아니라 아들로 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들의 지위를 다시 되찾아 주었습니다.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진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입니다. 무조건적인 용서가 흘러갈 때, 진정한 십자가의 능력이 회복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가 강력한 영적 권세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질문2) 마태복음 18장에는 일만 달란트 빚진자의 비유를 읽고, 그 의미를 파악하여 생활속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관계를 점검하고 용서하는 기름부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게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마 18:23-35).
일만달란트 빚진 자의 빚을 왕이 전부 탕감해주었습니다. 즉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만 달란트는 예수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주민 전체가 로마 정부에 내는 1년 세금이 이백 달란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에 견주어 보면 엄청난 돈입니다.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이에 비해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삯)은 장정이 100일 일한 품값에 불과 합니다. 문제는 일 만달란트 빚진 자는 빚을 전부 탕감 받았는데,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가 잠시만 참아주시면 반드시 갚겠다고 애원하는데 그 청원을 거부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일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의 못된 마음을 보고 왕이 악한 종에게 모든 빚을 갚을 때까지 다시 감옥에 넣었습니다. 이 비유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조그만 빚을 탕감하지 않으면 자신의 죄에 대한 탕감이 무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의 초점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모든 죄를 탕감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예수님이 생명을 주고 얻은 고귀한 복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기쁨이 나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웃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와같은 용서 청원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겠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겼는지요.
③용서는 묶여 있는 것들로부터 해방
임영수목사님이 쓰신 {주기도문학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없던 일로 한다든지, 잊어버린다든지, 원상태로 돌려놓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명히 손해가 있고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상대방을 그 실수와 아픔과 원한에 묶어 놓지 않고 해방시켜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그것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한 감정과 아픔과 선입견에 상대방을 묶어 놓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 역시 다른 사람에게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담을 쌓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용서를 거절하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는 그러한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용서의 대상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는 이웃을 소외시키고 따돌리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작업입니다”(임영수, 주기도문 학교, p.84).
사회적으로 용서는 악의 확신을 방지하고 신뢰와 평화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인간성이 회복되어지는 건강하고 따스한 사회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는 사회는 죽이고 파멸시키고, 미움과 적대적인 감정만 계속 쌓아 가지만, 용서는 건강한 창조를 만들어냅니다. 이웃의 죄를 용서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는 기도는 우리가 매일 매일 해야 할 소중한 기도 제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분열증’과 대항해서 싸워야겠다는 결연한 다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탕감을 받기를 원한다면 이웃의 죄 탕감의 요구를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질문)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분열증’에 걸려 있습니다. 자신의 죄는 탕감받고 싶어서 기도하고, 이웃이 나에게 준 상처와 피해 등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의 잣대를 거부합니다. 결국에는 분열증에 빠져 있는 모습입니다. 당신의 삶속에는 용서의 복음이 작동하고 있는지요.
④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마틴 루터(M. Luther)는 “그리스도인들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영원히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죄의 자백이 필요합니다. 죄를 자백하는 행위는 날마다 빚을 갚는 것과 동일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죄를 숨기는 행위는 빚을 갚지 않는 것과 똑같은 범죄 행위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대단히 흥미로운 사건은 베드로의 발을 씻으면서 나눈 대화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6절).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 시몬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9절).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10절).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내용 중에 두 가지 씻음을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목욕이며, 다른 하나는 발 씻음입니다. 주님은 목욕을 되풀이해서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목욕이란 중생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단 한 번의 영적인 사건입니다. 한 번 주님이 너는 나의 자녀라고 인정하시면 우리는 영원히 주님의 구속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그러나 발은 매일 씻어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허물속에서 지냅니다. 날마다 발을 씻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과 접촉하면서 내 영혼과 삶이 더렵혀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죄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사 66:18).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벧전 3:12).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우리는 위의 성경 구절에서 분명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란 바로 우리들이 지은 도덕적인 모든 빚(debts)을 말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빚을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죄에서 떠남으로써 자신의 빚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순간순간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질문) 시편 51편은 다윗이 간음죄를 짓고 하나님께 통회 자복하는 비탄의 기도입니다. 먼저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죄를 고백합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쫒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시 51:1-19).
⓹주기도문은 적극적인 제자도를 요청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나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줄 수 있는 힘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죄의 용서를 구하고, 이웃에 대한 용서를 실천할 때 비로소 샬롬이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찾아오게 됩니다.
김세윤 교수는 바리새인의 경건주의적 소극주의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음식 가리고 손닦고 그릇 닦는 정도의 경건이었습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도 술 안마시고, 담배 안피우고, 제사 안 지내는 정도면, 하나님 백성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소극적인 경건주의”라고 합니다. 이런 소극주의적 경건주의에는 진정한 샬롬이 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더러운 것들이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순종을 포기하는 것, 이웃에 대한 증오와 무시와 무관심이 다 우리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이것들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렵게 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은 먹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삶에 진정한 샬롬이 임하기를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주님의 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청원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적극적인 서약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으로 살겠다는” 서약이 포함된 것이며,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의 청원은 항상 우리 이웃들의 죄를 용서하며 살겠다는 적극적인 제자도의 자세입니다. 이럴 때 진정한 샬롬이 삶의 자리마다 회복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