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욱 사랑한 한부선 선교사

  • 입력 2023.01.19 11:41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97)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09)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쉬바트 찌온)를 돌려 보내실 때에(베슈브 아도나이)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햐이누 케홀밈).”(시편126:1)

새해가 밝아 왔는데 여전히 코로나 변종은 우리를 괴롭히고 전염병의 위협과 일상의 어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세계의 경제대국 중 유일하게 유아 출생률이 최저이다. 학령인구 감소로 입시 지원율이 최저를 기록하고 있어서 대학은 줄폐교를 예고하면서 나라가 재앙의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국가 존립의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데 정쟁(政爭)을 일삼는 정치가들은 이 위기를 직면하지 못하고 문제 해결을 예산과 돈에만 집중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을 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나을 수 있는데 답답하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고 찾고자 한다.

구약 성경 중에 인생 문제 중에 고난과 기쁨, 환난과 환희, 감사와 찬양의 삶을 보여주며 죄인과 악인, 원수와 대적자의 문제를 명쾌하게 답하고 있는 것이 시편이다. 이 시편은 우리에게 오늘도 어려운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다. 시편은 이 인구감소, 고령화의 문제에 답을 줄 수 있을까? 시편 126편은 답을 줄 것이다. “그 때에(아즈)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이말레 세호크 피누)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우레쇼네누 린나) 그 때에(아즈)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요메루 바고임)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히게딜 아도나이 라아쇼트 임 엘레) 하였도다”(125:2). 어찌 일 년에 우리나라 여성들이 0.6명도 낳지 않는가? 과거 자녀 1명 갖기 운동으로 산부인과 의사와 병원들이 유아를 살해한 재앙이 이제 돌아오고 있는 것인가? 이제라도 회개하고 미스바 집회를 하며 전국민 자녀 많이 갖기 운동을 벌여야 한다. 이는 과거 IMF때 금모으기 운동을 하여 세계를 감동시켰던 것처럼 출산 애국운동을 벌이며 5000만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어야 할 것이다. “뭇나라, 열국이 큰일을 행하셨다고 고백하고 감탄하게 하는 일이 벌어져야 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히게딜 아도나이 라아쇼트 임마누) 우리는 기쁘도다(하이누 세메힘).”(126:3) 이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70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시온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를 낳지 않는 한국 여성과 그 교육만큼이나 어려운 국가적, 역사적 문제는 통일하지 못하고 있는 한민족의 난제(難題)이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귀환의 염원과 소원을 그들의 신앙의 중심에 놓고 간구하고 탄원하고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에트 쉐비테누 카아피킴 바네게브) 돌려보내소서(슈바 아도나이)”(126:4). 우리는 이제 출산 강국, 통일 강국을 위한 기도와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어야 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하조르임 베디메하 )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베리나 이퀘쪼루)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하로크 에레크 우바코 노쉐 메쉐크 하자라)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보 아보 베린나 노세 알루모타이오).”(126:5-6)

눈물을 흘리며 울며 민족 부흥 간구의 씨를 뿌려야 할 때이다. 이 씨를 먼저 뿌리는 자는 누구인가? 선교사들은 예지적 통찰력을 가지고 한 민족의 빛을 보여주었던 인물이다.

방위량(블레워) 선교사의 사위,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 선교사는 가장 한국적인 선교사로서 알려졌으며, 방위량 선교사의 딸 캐더린과 혼인하였다. 그는 윌리암 헌트(한위렴)가의 아들로서 블레어(방위량)()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두 선교가문이 한 가정이 되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일본경찰에 끌려가 옥고를 치렀고, 결국 1942년 포로교환 형식으로 미국으로 추방당한다.

그 후에 맥아더 장군의 여행 허가로 194610월 다시 입국하여 부산에 거주하면서 평생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고신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한다. 해방 후 가족들의 동반 입국이 거부되어서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한부선 서간집>이 출판되어 옥중기, 인터뷰 등 7권의 전집을 내서 한국 초기 선교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한국어에 능통하여 한국, 한국인, 한국 교회를 제일 사랑한 선교사로서 한국 교회와 한국 문화를 소중하게 여겼다.

부산 송도에 세워진 고려신학교와 한부선 선교사(교수)
부산 송도에 세워진 고려신학교와 한부선 선교사(교수)
제12회 졸업앨범, 학교 사진 바로 옆 왼쪽 상단에 교장 박윤선 목사 아래가 부교장 한부선 목사, 학교마크 바로 위가 이사장 한상동 목사
제12회 졸업앨범, 학교 사진 바로 옆 왼쪽 상단에 교장 박윤선 목사 아래가 부교장 한부선 목사, 학교마크 바로 위가 이사장 한상동 목사

그는 재령에서 사무엘 마펫과 함께 많은 교회와 명신학교를 세운 재령 선교의 아버지, 한위렴(William B. Hunt)의 아들로 1903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을 졸업하고 하얼삔에서 선교 사역을 한다. 만주에서 신사참배 운동에 반대하는 문서 운동에 주동이 되었고, 25교회 800여명이 서명을 받기도 하였다. 해방 후 신학교 사역을 하면서 헬라어, 교회사, 호세아서, 출애굽기, 에베소서, 교회정치, 설교학, 영어회화 등을 가르치다가 19765월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가서 89세 인생을 살다가 소천하였다.

그는 신학교 재정지원과 기여하였고 국제 교류와 도서 확충, 신학생들의 멘토사역, 전도와 학생 신앙운동(SFC), 구제 사역과 복음병원 등의 사역을 하였다. 베졸트 선교사 소개로 한상동 목사를 만났고, 박윤선 박사와 협력하게 되었다. 그 후에 박윤선 주석이 나오는 데 산파 역할을 하였고, 문서 선교에 앞장서서 <파수꾼> 창간, <진리 운동>등 한국 개혁의 나팔수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한 선교사의 일생을 보면서 한 민족 구원 역사의 중심에서 역할 한 것을 보게 된다. 오늘도 땅 끝에 선, 주의 종들을 통해 복음세계, 복음 제국은 형성되고 있다. 이는 한 알의 밀알이 썩어지는 과정을 통해서다. 이제 복음을 위해 눈물을 흘리려 나가자.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