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에사 에이나이 엘 헤하림 메아인 야보 에즈리)”(시121:1).
역사란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의 대화인가. 과거의 구속적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사명을 환기(喚起)하게 하여 미래를 향한 비전을 선포하게 하고 지도자는 그 카리스마와 권위를 불러일으켜 공동체에 리더십을 통한 새로운 활로(活路)를 열게 한다. 우리 민족과 나라, 우리의 속한 공동체는 이러한 하나님의 리더십을 주어 이를 열어가게 한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알 이텐 라모트 라게레카 알 야눔 쉬메레카)”(시121:2,3).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이스라엘의 시편으로서 축복과 저주의 시편이다. 참회의 날을 위한 의식과 제의에서 회중의 직접적인 축복을 언급하며 제사장적 언설 형식으로 시편을 구성한다. 이 시편 121편은 회중을 개인적으로 대표하는 언술로 표현하여 여기서 축복의 본질을 묘사하기보다 자세한 말로 나타낸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아도나이 이쉬마레카 미콜 라 이스모르 에트 나프쉐카)”(시123:7).
코로나 전염병 시대를 지내면서 사람들은 불안의 후유증으로 인해 남은 전염병의 여진(餘塵)이 남아 있어서 마스크를 벗지 못한다. 이 환난에서 벗어날 길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이 구원의 단초(端礎)를 제공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 영원한 파수꾼, 완벽한 보초, 깨어서 동료 병사를 잘 지키는 완벽한 불침번, 대적이 침공할 수 없는 완전한 위병(衛兵)이 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완전하게 쉴 수 있는 것이다. 이 시편에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서 시온, 다윗의 성전, 예루살렘 성산으로 올라가는 의식적 오름을 말하며 다윗 왕의 역할과 성전 제의 시작의 축제, 거룩한 제의 드라마 재현을 통한 왕 즉위 의식이 진행되면서 야웨 왕의 축제 의식이 진행된다. 다윗 왕조의 번성과 자비, 예언자 신탁의 행복과 축복을 선포하고 여호와의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복된 행운과 축복이 이루어짐을 말한다. 이러한 복합된 축복 의식은 시편 66, 81, 95, 118, 121, 126, 134편 등이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요맘 하쉐메쉬 로 야케카 웨야레아흐 바라에라)”(시131:5-6). 이 제의 의식에서 축복의 말로 상함이나 해침이 없는 주의 지키심을 말하며 그늘과 밤의 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예배자가 축복의 말로 선포된 대답을 살필 수 있다. 영혼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축복은 성전, 하나님의 성산, 예루살렘 시온산에서 옴을 나타내며, 그 축제 절기에 축복의 의식 선포를 통해 회중과 개인의 신앙 고백을 통한 위로와 신앙의 확신을 갖게 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아도나이 이쉬모르 쩨테카 우보에카 메아타 웨아드 올람)”(시121:8). 부모가 마른자리, 진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어린 갓난아이를 눈동자같이 돌보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주무시지도 않고 돌보신다는 표현으로써 그 생생한 시적 묘사를 통한 신인동형적 표현은 감동적인 돌보심의 시적인 극적 표현이다.
이러한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선교사가 있다. 한민족의 파수꾼으로서 선교사는 이런 역할을 한다. 엘리스 R. 아펜젤러(Alice. R. Appenzeller, 1885-1950, 아편설라)는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 선교사의 딸로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여성이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맏딸로서 그녀는 1922년 10월-1939년 4월까지 이화여자 전문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명예 교장에 추대된다.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후 1940년에 귀국한다. 다시 1947년 이화여자 대학교 명예 총장으로 추대되어 1950.2.20일 대학 채플 설교 중에 뇌내출혈로 소천하게 된다.
앨리스 선교사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인 아이들과 어울려 한국어와 한국 음식, 풍습 등 한국 문화에 자연스럽게 익숙하면서 자란다. 그녀는 청소년 때에 중국 산동성 치푸의 외국인 학교에서 교육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1905년 랭카스터의 쉬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의 여성 대학 웨슬리대학에 진학하여 1909년 졸업한다. 졸 업후 모교에서 선생을 하다가 1912년 YWCA 중등학교와 대학교 여학생회의에서 ‘한국을 공부하는 반’을 개설하여 한국 문화를 알린다. 그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서울 정동의 이화학당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다가 1920년에는 이화학당 당장 서리로 학교의 운영과 행정에 참여한다. 학당장이 된 앨리스는 여자 대학 설립 계획을 추진하여 대학과를 위해 프라이홀을 신축한다. 총독부로부터 여자 대학을 정식 승인받으며 1925년 4월 인가를 득해 이화 여자 전문학교로 승격되며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여성 대학으로 세워가기 위해 신촌에 학교 부지를 정하고 캠퍼스 조성 기금을 마련한다. 1933년 정초식, 신촌 캠퍼스 신축 공사가 1935년 마무리되면서 신촌으로 대학을 이전 5월 31일 봉헌식을 가진다. 이로써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종합 대학을 향한 기틀이 마련된다.
앨리스 선교사는 평생 미혼으로 살면서 이화의 발전과 인재 양성을 위해 노력한다. 또 학생들의 사회봉사와 농촌 계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나눔과 봉사의 정신을 실천한다. 그녀는 이화 여대의 기틀을 세우고 한국인 제자 김활란에게 교장직을 인계하고 명예 교장에 추대되고 나서 이어서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한다.
앨리스는 66세 나이로 설교 중 소천하는 일이 생기게 되자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이 열린다. 그 때에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여 사회장으로 거행하고 양화진에 안장되게 된다. 그녀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신앙과 삶의 위대한 발자취는 이화의 어머니로 서 있게 하였다. 이화여대학의 기초를 세운 아펜젤라 선교사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한국 여성 교육의 산실이 되어 한국 여성의 계몽과 새 빛을 준 귀한 선교사역을 한 것이다. 군산 앞바다 어청도에서 흘린 아버지(헨리 아펜젤러)의 선교의 피가 딸(가장 사랑하는 딸, 엘라)에게도 이어져 고귀한 선교사 가문의 대를 이은 엘라 아펜젤러이다. 그녀는 이처럼 대를 이어 한국 선교의 금자탑을 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