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키 엘로힘 쇼페트 제 야쉬필 웨제 야림)”(시75:7).
경칩이 바로 지났다. 세월은 어김없이 흐르고 인적은 온데간데없지만 땅은 영원하다(전도서 1: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도르 호레크 와도르 바 웨하아레츠 르올람 오데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긴 전쟁이 이제 종전을 앞두고 있다. 강대국의 이권이 추구되는 국제 사회의 냉혹한 힘의 논리는 어김없이 또 그 질서와 이전 힘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알 타리무 라마롬 카르네켐 테다베루 베짜와르 아타크)”(시75:5).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아마르티 라호레림 알 타홀루)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으니”(시75:4). 이러한 현실은 시편 75편 기자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네모김 엘레츠)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셀라)”(시편 75:3). 땅의 기둥이 세워진 배경, 그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말한다. 시편 75편은 아삽의 시, 영장(인도자)으로 알다스헷(폐허로 만들지 마소서, 멸하지 마소서)에 맞춘 노래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시편 57-59편처럼 시편 75편은 알다스헷(멸망시키지 마소서)의 탄식시로 연단적인 불세례를 통해 정금같이 나오는 신앙이 요구된다. 이사야 36장과 37장의 히스기야 시대의 앗시리아 침공의 배경에서 아삽의 후손이 지은 시라고 본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랍사게 군대 장관을 위시로 예루살렘을 침공하러 보내는 장면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항복하라고 권하는 장면이 나오며 애굽의 도움이나 너희들의 신 여호와를 의뢰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고 하는 내용이다.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찌라도 꾀임을 받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그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그 때에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고하니라”(이사야 36:18, 22).
시편 75편 기자는 극적으로 예루살렘과 그 성 주민이 극적으로 구원 받은 사건, 난공불락의 시온 성의 구원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구절로 시작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키 에콰흐 모에드 아니 메샤림 에쉬포트)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이는 우리의 인생의 극적인 상황을 말하며, 곧 멸망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적으로 구원받는 상황을 지시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심판하시는(샤파트) 하나님에게 달렸다는 믿음 고백으로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키 에카 모에드 아니 메샤림 에쉬포트)”(시75:2).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과 세우심이 바로 그분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재판장이 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75:6-7). 인생은 어떤 조건을 갖춘다고 해서 스스로 높아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며 인생의 높음과 낮음을 결정하는 분은 재판장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한다. 하나님은 태산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하루아침에 낮출 수 있고 어떤 조건도 못갖춘 사람이라도 높일 수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은 강대국, 제국의 왕이 움직이는 것같이 보이지만 결국 3-4년 후에는 그 권위와 권세의 손도 쇠하게 되고 오만하고 악한 자에게 진노의 잔이 쏟아질 것을 말한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아크 쉐마레이하 이메쭈 이쉐쿠 콜 리쉐에 아레츠)”(시 75:8). 결국 찬양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는 겸손하고 의로운 그의 백성 야곱에게서 불리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들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시75: 10). 앗시리아 제국의 산헤립 왕이나 군대장관 랍사게의 위용이나 조롱, 여호와를 능멸하는 소리는 결국 오만한 자의 술거품이나 찌꺼기나 또 짤려진 뿔이 될 것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웨콜 카르네 레샤임 아가디아 테로마메나 카르노프 짜디크)”(시75:10). 하나님의 높이는 영광은 의인에게 이루어짐을 결론적으로 노래하며 시편 75편은 마감한다. 이 공동체 찬양 시편은 세계 질서의 혼란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이 그 기둥을 세우는 질서, 그 창조의 질서와 공정한 심판과 견고한 지킴의 현실을 가르쳐주며 심판주 하나님의 공의로운 미래를 제시하며 의인과 겸손한 자의 행복한 결말을 보여준다. 이러한 찬양의 삶을 살아간 선교사가 있다.
조세핀 오헬리아 페인(Josephine O. Paine, 1869-1909, 폐인陛仁), ‘섬돌같은 어짐(인자仁慈)’의 이름을 가진 페인 선교사는 이화학당의 3대 당장으로 15년간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며 이화학당의 기초와 그 기틀을 세웠다. 페인 선교사는 1869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출생하여 보스톤 공립학교 졸업한 후 보스턴의 서점에서 회계 직원으로 근무한다. 그 후에 1886년 감리교회에 등록하여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다짐하고 구세군과 함께 빈민가 봉사활동에 참여한다. 폐인 선교사는 17살 되던 1886년 부흥 집회에 참석하여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그녀가 해외 선교사로 부름 받고, 보스턴 여선교사 훈련학교에 들어가서 선교 훈련받는다. 페인 선교사는 1892년 9.18일에 한국에 들어온다. 그녀는 이때부터 1907년 6월까지 이화학당에 제3대 당장을 역임하면서 교사로 여성 교육 사역을 하게 된다. 1899년 룰루 E. 프라이와 함께 한국 최초의 생리학 교과서, <젼톄(전체)공용문답>이라는 책을 저술한다. 그녀는 1904년 이화학당 중등과정을 개설하고 1907년 6월 룰루 프라이에게 당장직(교장)을 넘긴 후 제물포와 해주 지역 선교 활동을 하러 떠난다. 그 후에 활발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폐인은 1909년 9.25일 안타깝게 콜레라 전염병으로 소천하게 된다.
페인 선교사는 15년간 이화학당(3대 당장)을 맡아서 교육하며 특히 1904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고 학생들에게 나라 사랑과 민족의식을 심어준다. 그녀는 2대 루이자 C. 로드 와일러 학장에 이어서 이화학당을 책임지며 1900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모금한 기부금으로 서양식 본관 건물을 신축하는 등 시설 확충에 힘쓴다. 페인은 당장직(교장)을 프라이에게 인계하고 제물포, 해주, 강화도 지역을 오가며 2년간 해주 인근의 75곳의 교회와 강화도 주변의 22개 섬 61개 곳의 교회에서 말씀을 전한다. 그녀는 왕성하게 복음전도를 하다가 그만 전염병으로 40세의 젊은 나이에 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된다. 조세핀 페인 선교사의 이야기는 이화여자대학교의 홈페이지에 볼 수 있는데, 제물포 선교를 하면서 3개월 동안 여자를 전도하게 된다. 조선의 높은 문맹률이지만 선교사는 하나님 말씀의 귀중함을 연구하도록 하며 여성 차별의 어두움을 퇴치하며 병든 자를 치료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한국 선교 현장(The Korean Mission Field, 1907년 12월호) 잡지에 심포지엄란에서 여성들의 문맹 퇴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싣는다.
페인 선교사는 1904년 9월 중학과를 설치하고 성경과 영어 강의, 체조를 교육 과정에 첨가하여 지도한다. 또 재봉, 자수를 가르치는 가사과를 설치하고 여성 해방의 기틀을 가지며 한국의 여성 평등의 길을 연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조선 민족을 가족으로 삼고, 특히 조선 여성, 소녀들을 자신의 딸로 삼아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사역한다. 조선은 남존여비의 봉건사상이 지배적이어서 여자는 소와 짐승과 같은 한 물건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화학당은 여기에 혁신적인 생각으로 여성의 자유와 해방의 터전을 마련하는 빛의 산실이 되었다. 그녀는 한국 선교의 중심이 미개한 사회와 민족의 빛을 전하는 일, 계몽과 교육 선교를 중심으로 선교한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에 침탈당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조선의 여성 해방과 민족 독립의 자주 정신을 고취하게 한다. 폐인 선교사는 기도회를 통해 나라 사랑을 일깨웠고 체조 교육을 통해 튼튼한 나라를 기도하였다. “나라가 튼튼하려면 몸이 튼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화학당의 체조 교육은 나라의 큰 이슈가 되어 여자가 조신하지 않고 분방하게 한다는 유교식 사조로 인해 이화학당의 여자를 며느리로 삼지 않겠다고 하는 풍조가 생기게 되었다. 여자의 발걸음이나 팔 흔드는 것까지도 극히 제한하던 유교 시대에 이는 혁명과 같은 것이었다. 여학생들의 팔 벌리기, 뜀뛰기를 가르치는 것은 당시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페인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조 수업을 강행하였다. 그 후 3년 후 1895년 고종이 덕(德), 체(體), 지(知)를 교육의 3대 강령으로 정한 교육입국조서를 공표하면서부터 사람들은 이화학당의 체조 수업을 받아들였다. 페인의 공저, 생리학 책은 68쪽의 총 10장으로 되어 있어서 인체의 각 부분의 구성과 기능, 위생에 관한 내용을 문답식으로 만든 교과서였다. 페인 선교사는 학생들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면서 엄한 교육을 하여서 학생들은 선교사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식료품 조달을 위한 장보기도 직접 담당하였는데 그녀의 시장 행렬은 앞뒤에 각각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는 사인교(四人轎) 가마를 타고 기수 호신인(護身人)을 앞세웠다. 늘 흰밥(쌀밥)을 해주니 학생들이 팥밥을 먹고 싶다고 하면 가끔 시장에 나가 팥을 사다 팥밥을 해먹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국의 여성들이 깊고 큰 굴레를 벗고 반만년의 형장을 풀고 서서히 자유를 구가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성에게 광명한 세상이 오도록 페인 선교사에 의해 열리고 있었다. 선교사는 이처럼 그 사회에 빛을 주는 전령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