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네퀴 카파임 우바르 레바브 아쉐르 로 나사 라샤웨 나프시 웨로 니쉐바 레미르마)”(시24:3-4).
입춘이 지나고 졸업과 봄 방학이 시작되는 때이다. 나라는 시끄럽지만, 하나님이 섭리로 이끌려 가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사 베라카 메에트 아도나이 우쩨다카 메에로헤 이쉐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시24:5-6). 시편 24편은 예배의 자리에서 나온 시로서 시편이 제의(예배) 목적으로 쓰인 시임을 고려할 때 어떤 시어들의 기준과 그 삶의 자리, 시의 공식어, 의식(예배)적인 구를 발견하고, 우리는 의식과 제의의 목적에서 어떻게 시편이 구성되었는지 알게 된다. 시적인 높은 질적인 것과 시편의 커다란 시의 본래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축제의 과정에서 시편 24편, 68편; 118편; 132편은 왕 즉위 축제의 과정과 그 묘사와 행동,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고 그 축제의 과정의 비전(모습)이 잘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적인 진행 시는 구약성경 본문의 암시를 통해 시를 해석하는 독자는 많은 영감과 자신의 상상을 통해 그 정확한 상황의 묘사를 추정하게 되고, 시편이 분리될 수 없는 어떤 상(像)을 통해 정확한 상황과 더불어 시어를 통해 상상하거나 회상하도록 한다. 시편은 68편과 연관되어 시편 24편은 분명한 시적 단위와 내적 일치와 더불어 시의 합병을 가져오게 한다.
시편 24편은 중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성전으로 가는 길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 이 시편은 사용되어 성전 문 앞에서, 또 성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그 절차의 바람(소망)들까지도 표현하려고 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세우 세아림 라쉐이켐 웨힌나쉐우 피테헤 올람 웨야보 메레크 하카보드)”(시24:7). 성전으로 들어가는 예배자들은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알 수 있으며 그 성전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약의 백성의 제의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이 문으로 먼저 영광의 왕, 여호와가 들어가시는 것을 시편 기자는 묘사하고 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미 제 멜렉 하카보드 아도나이 이주즈 레깁보르 아도나이 깁보르 밀하마)”(시24:8). 그 분은 바로 전쟁의 능한 여호와로서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하시는 분이시다.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그 분은 찬송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시며 영광의 왕이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시24:10).
거룩한 곳에 설 자,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마음이 청결한 자, 뜻이 진실된 것에 있는 자,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이다(시24:4). 이는 의로운 자이며(체데크),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은 자, 율법과 십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시편의 예배자는 항상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며 대적들을 물리치기 위한 도우심을 바란다. 기도의 응답자, 믿음의 형통자, 신앙의 축복자는 바로 성전에 서는 사람이며, 이로써 여호와께 복을 받게 된다. 시편 기자는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는 자이다(시24:5). 왕 즉위 시편처럼 가을 추수 축제와 신년 왕즉위 시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강림하고 있다.
시편 46편, 48, 75, 76, 81편과 같이 이 시편 24편은 다른 시편 중에 가장 중요한 시편에 해당한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키 후 알 야밈 에사다흐 웨알 네하로트 예코네네하)”(시24:1-2). 이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과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영광으로 왕으로 들어오시니 문을 열고 들어가도록 표현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라고 호령하듯 시편 기자는 왕의 출현을 선포하며 시어를 표출하고 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들어오는 개선장군처럼 승리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왕으로서 들어오는 과정을 특징적인 묘사로서 그리며 이 시는 그 변화하는 장면과 그 과정의 느낌과 감정을 잘 표현한다. 이러한 왕의 입장 과정의 묘사는 시편 68편, 시 132편과 24편, 118편에서 잘 나타난다. 이 왕의 출현과 입장의 의식은 시인이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의 절정이 된다. ‘영광이 왕이 들어가시리로다’(24:9). 이 시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왕즉위 입장을 표현하고 있고, 특히 시 132편은 성소 밖 어떤 장소에서 법궤를 이전하는 준비 단계를 다룬다. 시편 24편은 성전의 문 자체와 그 안의 묘사를 하며 성전에서의 활동을 그리고 있다.
시편 24편은 축제의 다른 면을 또 잘 그려주고 있다. 시편 132편은 축제 날의 첫 시작을 보여준다. 이는 성전 뜰, 밖의 장소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오벧에돔의 집과 상응해서 시온으로 옮겨온다. 다윗은 3개월간 법궤를 가져오는 동안 그 법궤가 서 있을 성전에서 찬양하게 된 것이다. 이는 시편 24편에서 성전 문에 다다르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시편 24은 세 부분으로 이것을 잘 표현해준다. 첫째 1-2절은 창조주와 피조 세계의 통치자로서 하나님을 그 도입부에서 시인은 찬양한다. 두 번째 3-6절에서는 성전으로 들어가는 과정과 성전 문지기 사이에 대화를 말하며, 그 문지기는 성도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며 성전에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예배자의 들어가는 조건과 회중의 대규모의 야외 행사의 이야기 측면에서의 그 예배자의 확신을 가지고 또 성도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7-10절에서는 성전 문에서 그 복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께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서 ‘영광의 왕이시여 만군(제바오트)의 여호와이시다’고 고백하고 있다.
결국 축복의 시편은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을 축제의 예배를 통해 그 계명(토라, 말씀)을 회상하며 축복의 조건을 만족시키며 이를 충족시키는데 있다(시24:3이하). 따라서 이 제의(예배)를 통해 성전에서 여호와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며 시인과 이 시의 독자는 제의의 축복에 참여해야만 하는 것이다. 죄인이 정결해지고 저주를 끊는 회개를 통한 축복의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의 길에 들어서서 그의 성전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 성령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편 24편의 대규모 야웨 행사는 성전에 방문하는 사람의 사전 입장의 자격으로서 토라를 충족시키고 또 그 축복의 조건으로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축복의 공식을 암송하고 준비하는 자이다. 이는 그 대답으로서 여호와의 축복을 받을 사람으로서 머리를 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축복의 인생을 산 선교사가 있다.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1860-1956, 어비신)는 캐나다의 선교사이자 의사이다. 그는 1893년 6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한국에 체류하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 에비슨은 온타리오 약학교를 졸업 후에 모교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1884년 토론토 대학교 의과 대학에 편입하여 1887년 6월에 졸업하였다. 의과 대학 재학 중인 1885년 7월 제니 반스와 결혼하였다. 그는 의과 대학을 졸업한 후에 강사를 거쳐 교수가 되었으며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로 활약했다. 선교 모임에서 만난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제안을 받고 선교사로 자원하면서 교수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는 1893년 6월 가족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를 떠나 부산을 거쳐 8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에비슨은 제니 반스 에비슨과 사이에 고든 에비슨(장남 선교사), 더글라스 에비슨(사남, 선교사 세브란스 의과 전문학교 병원장 역임, 서울 외국인 묘지 공원 안장)를 낳았다.
에비슨 선교사는 처음에는 제중원의 책임을 맡아서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에비슨은 교단별로 산재해 있는 진료소를 묶어서 규모가 있는 병원을 설립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러던 중 에비슨의 안식년 기간 중 ‘세브란스’라는 석유회사 사장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세브란스가 에비슨에게 1만 달러를 기부한 것이다. 그의 이름을 딴 세브란스 병원은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에 세워졌고 세브란스 가의 계속된 기부를 통해 병원은 계속 증축될 수 있었다. 에비슨은 한국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 양성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서 1899년 제중원 의학교를 개설하였다. 의학교는 적당한 교재가 없어서 김필순과 함께 해부학 서적을 어렵게 번역했지만 사고로 소실되었다. 하지만 더 많은 교수들을 충원하면서 학교는 점차로 발전되었다. 박서양도 한국인 교수로서 봉사하지만 처음에는 장티푸스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그는 백정과 천민에게 복을 전했던 백정 박성춘의 아들이기도 했다. 한편 에비슨은 병원장을 그만두면서 다른 선교사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오긍선이 자신의 후임이 되도록 하였다. 이것은 선교의 목적이 한국 사람들 스스로 모든 책임을 맡을 수 있도록 한 평소의 소신을 실천한 것이다.
에비슨은 이외에 연희 전문학교의 교장을 맡아 1916년부터 18년간을 일하는데 이는 그의 특유의 성실함과 겸손함, 균형감각 덕분이었다. 33세에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온 그는 42년간 훌륭한 선교 사역을 마감하고 돌아가 96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에비슨은 제중원을 운영하면서 6개월간 왕의 경비 3000원 중 절반을 이미 받아야 하지만 반의 반도 받지 못하는 등 정부 관리들에 횡포에 시달리던 에비슨은 용단을 내리게 된다. 그는 찾아오는 관리들에게 공정하고 바르게 대하며 단호하게 일 처리를 한다. 한편 전임자 빈톤의 선교 목적의 경비 지출과 환자의 숫자 감소를 분석하면서 에비슨은 의료 행위와 선교 행위가 혼합되어 있는 것을 파악하고 그 본연의 의료 활동이 감소한 것을 파악하여 보다 더 집중적으로 의료 활동을 하기에 집중하게 된다. 1908년 그는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7인을 배출하였다. 에비슨은 제중원과 세브란스 의학 교육을 통해 균형 있는 교육을 하였다. “지성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자연스럽게 영적인 각성을 따라 간다”며 전인적인 균형 성장을 바탕으로 에비슨은 과학과 신앙의 동반 성장을 도모했다. 에비슨은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기독교인 친한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변함없는 한국 사랑을 보여주었다. 1966년 세브란스의 영원한 스승 에비슨을 기념하기 위한 동상이 세브란스 병원에 세워지게 된다.
그의 아들 더글라스 에비슨은 1893년 부산에서 태어나서 아버지가 나온 캐나다 토론토의 의대를 졸업한다. 1920년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게 된다. 그는 선천 선교부, 서울 선교부, 세브란스 의전 소아과 교수 및 병원장으로 봉직하다가 태평양 전쟁 직전에 캐나다로 돌아갔다. 1952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별세하여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내 캐서린도 1985년 87세 별세한 후 양화진에 있는 남편 묘에 합장되었다. 이처럼 대를 이어 한국을 사랑한 예비슨 가는 한국 선교의 샛별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