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한국 여성 고등 교육의 개척자, 프라이 선교사

  • 입력 2025.03.20 08:56
  • 수정 2025.03.2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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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 이야기 (408) - 구약성경과 선교 이야기 (220)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웨로 힐라크티 비게돌로트 우베니펠라오트 밈메니)”(시131:1).

이제 봄이 와서 자연으로, 들로 나가는 계절이다. 봄볕이 따사롭고 만물이 소생하는 계이다. 봄날처럼 우리의 사회도 밝게 빛나기를 바란다. 정국이 풀리고 하나 되어 통일의 기상을 바라는 한반도가 되기를 소원하며 시편 131편에서 우리는 말씀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 시편 131편은 확신의 시편으로서, 지혜와 토라 시편, 역사 시편, 성전 입장 시편, 순례 시편의 단위들 군 속에 속해서 확신의 시편과 야웨 신뢰의 시편이다. 이 신뢰 시편은 시편 11; 16; 23; 27:1-6; 62; 131편 등이 이에 속한다. 민수기 6:24-26절의 아론의 축복(축도)구절이 평행적으로 시편에 나오는데 제사장적 축복(축도)이 언급된다. 이에 예외적으로 시편 124, 126, 131편을 볼 수 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임 로 쉬이티 웨도맘티 나프쉬 케감물 아레이 임모 카가물 알라이 나프쉬)”(시131:2). 이 축복의 시구는 영혼의 평화, 고요한 아이의 평온함, 어머니 품에 안긴 젖뗀 아이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말하며, 그 영혼의 평화 상태는 영적인 축복의 평화로움을 말하고 있다.

이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에서 분명한 시편 기자의 거대한 도식, 저자의 분명한 주제적 이유, 공통의 캐치프레이즈, 공동의 양식을 보여주며 특별한 시편임을 알린다. 이처럼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시편 120-134편들이며 시편 42/43-49, 84-85, 87-88편 들은 고라 자손의 시편, 시편 73-83편은 아삽의 시편이며 다윗의 시편은 시편 3-9; 11-32; 34-41; 51-65; 68-70; 108-110, 138-145편 등이다(비록 분리되었지만 시편 86; 101; 103; 122; 124; 131; 133편 등이다). 초기 시편 중에 다윗의 시편(3-9; 11-32; 34-41; 51-65; 68-70; 86; 101; 103; 108-110; 122; 124; 131; 133; 138-145편)이 이에 해당하고 또 성전 음악인 아삽의 시편(시50; 73-83), 고라의 아들 시편(시42-49; 84-85; 87-88편)이 연합되고 소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시120-134편)가 통합된다.

시편 131편은 짧은 시편으로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시120-134편) 중에 속해서 ‘위대한 할렐시편’(시120-136편)에 있다. 시온과 성전, 다윗의 시편은 5권에서 ‘영원히 여호와만 바라보겠다’는 시인의 고백(3절)이 절정에 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야헬 이스라엘 엘 아도나이 메아타 웨아드 올람)”(시131:3). 여호와가 영원히 거하는 거처, 시온에서 하나님의 복이 나옴을 말하며 그 시온, 성전에서 여호와를 바라겠다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다. 오늘 우리들의 삶도 이러한 성전,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 속에서 인생의 문제가 풀리고 형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비결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축복의 삶을 살아간 분이 계시다.

룰루 프라이 선교사(Frey Lulu E. 1868-1921, 부라이)는 26년간 조선 땅에서 독신으로 살면서 한국 여성 선교와 교육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녀는 특히 이화학당 교장으로서 종합대학교를 만드는데, 그 기틀을 세운 선교사이다. 프라이 선교사는 1868년 미국 오하이오 주 시드니에서 태어나서 벨포테인 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웨슬레 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시카고 사범 대학과 무디 성경학원에서 선교사 훈련받았다. 프라이는 당시 이화학당 교장이던 폐인 선교사의 부름을 받고 그 초청에 응하여 한국 선교를 결심한다. 1893년 10월 25살의 나이로 북 감리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이화학당의 교사로 부임하여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다. 당시에 이화학당에는 35명의 초등부 학생만 있었다. 청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서울의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내한한 반년 만에 풍토병에 걸쳐 1894년 6월 일본에 가서 요양하고 다시 그녀는 돌아오게 된다.

프라이 선교사와 '한국 여성 고등 교육인, 개척자 프리이'
프라이 선교사와 '한국 여성 고등 교육인, 개척자 프리이'

프라이 선교사는 폐인 교장을 도와서 생리학 교과서인 젼톄공용문답을 집필하였고, 미국의 자연지리학과 정치 지리학 교과서를 번역 출판하였다. 선교사는 학생이 신앙 생활을 하도록 매일 기도회를 열고 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또한 매년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그녀는 1907년 교사로 임명되어 15년 활동한 후 이화학당 4대 교장에 취임한다. 1908년 학당 창립기념 행사와 메이퀸 선발대회를 시작한다. 1910년에는 대학과를 신설하여 대학 과정의 교육을 시작했다. 1914년에는 대학과를 신설하여 대학 과정의 교육을 시작했다. 1914년에는 유치원과 유치원 사범과를 만들어 종합 교육기관으로 발전시켰다. 그녀는 유치원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학교 체제를 만들어 전인적인 교육기관으로 전 과정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종합적인 학교를 만든 것이다. 또 대학과 교수로 월터, 하몬, 파이 등 유능한 인재를 초빙하여 학교 교육에 교수의 질을 높혔다. 유치원 교육을 위해 브라운 리를 초빙하여 유치원 교육의 기틀을 잡았다. 이화 학당 대학과는 1925년 정식 대학으로 인정받으면서 현재 이화여대로 발전하였다.

프라이는 한국 독립운동에 협력한다. 1904년 1월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의 한국 점령 상황을 보면서 “마치 친한 친구의 임종을 지키는 기분입니다”라고 표현한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할 때에는 이화학당 학생들을 염려하여 대문을 가로막았으나 학생들은 담을 넘어 만세 운동에 참가해 구속자도 생겼다. 또 선교사는 두 번이나 구속된 박인덕 교사를 위해 면회하고 석방을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1919년 4월 수원 제암리 교회 학살 소식을 듣고 그 마을로 내려가 5-6주 동안 천막을 치고 머물면서 주민들을 위로하고 뒷수습을 도왔다. 그녀는 1919년 8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갔다가 다음 해에 유방암을 선고받는다. 그래서 이화학당 교장직에 퇴임하고 투병하다가 1921년 3월 매사추세츠 주 밀톤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1976년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은 이화 여대 창립 90주년 사업으로 메리 스크랜튼 초대 교장과 프라이 4대 학장, 아펜젤러 선교사 흉상 등을 세워 그 공로를 기념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한국 여성 고등 교육인, 개척자 프라이>책에 실려 있다. 유관순을 키운 박인덕 선생을 총애하던 프라이 선교사는 부라이 선교사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이화의 터전을 세운 분으로서, 한국 최고의 여성 교육의 산실을 일군 선교사였다. 교육과 선교는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열매를 맺는 이치가 실현되는 장(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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