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찌로다(콜 세비바이오 요비루 샤이 람모라) ”(시76:11).
이제는 봄의 기운이 완연히 느껴지는 때이다. 우리의 현실도 이제는 추운 동토의 땅이 해빙되듯이 그렇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포괄적으로 사회 현실이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와예히 베샬렘 수코 우메오나토 베찌온)”(시76:2). 시편 76편은 왕정 시편, 시온 예루살렘 성전 시편으로서 아삽 레위 제사장의 노래로 알려졌다. “(아삽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노다 비후다 엘로힘 베이스라엘 가돌 쉐모)”(시76:1). 이 시편은 유다와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분리 될 때에 상황을 반영한다. 유다 왕국과 북이스라엘 10지파가 분열되어 하나님의 직접 언약 백성인 유다와 이스라엘, 두 왕국이 일체감을 갖고 하나의 민족임을 알리는 시편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장막(미쉬칸)과 초막(수카)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으로서, 이 장막과 초막에서 하나님이 임한다는 사실을 말하며 살렘은 예루살렘의 고대 명칭으로서 멜기세덱 제사장이 다스리던 도시였다. 이곳에 법궤가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면서 하나님의 임재가 이 성산에서 임했던 것이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 셀라(샤마 쉬바르 리쉐페 콰쉐트 마겐 웨헤레브 우밀하마 셀라)”(시76:3). 화살은 불(레쉐프)이라는 말로 불화살을 언급하며 적들의 신속하고도 맹렬한 공격을 상징한다. 방패와 칼과 전쟁은 앗수르 산헤립 군대를 언급하며 히스기야 시대의 난공불락의 성인 예루살렘 신학이 세워지는 때를 반영한다. 앗수르의 공격에 시온성이 함락되면 유다 나라가 멸망 당할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극적으로 구원받는 이야기가 이 시편이다. 이 시편 76편은 셀라를 기준으로 세 부분으로 나눈다. 1-3절은 선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시온에 임재하신다고 노래한다. 4-9절은 하늘에서 공의로 판결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위엄을 노래한다. 10-12절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사방에 있는 모든 이들, 곧 이스라엘과 이웃하고 있지만 이방 신을 섬기는 주변국들도 마땅히 두려워할 대상인 하나님 한 분을 경배하라고 권고한다.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에쉐토레루 아비레 레브 나무 쉐나탐 웨로 마쩨우 콜 안쉐 하일 예데헴)”(시76:4-5). 앗시리아의 강한 침공이 있고 약탈이 심히 클지라도 결국 최강국이 잠에 빠질 것이라는 그 무력감을 표현한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미가아라테카 엘로헤 야아콥 니르담 웨레케브 와수스)”(시76:6).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역사하심이 인간과 나라에 미치고, 강대국과 여러 제국도 곧 무력한 잠에 들게 된다고 노래한다.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미샤마임 히쉐마에타 딘 에레츠 야레아 웨샤콰타)”(시76:7-8). 하나님의 진노 앞에 그 누구도 맞설 수 없음을 수사 의문문을 사용해서 강조하고 있다. 인생의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 끝맺음을 맺기에 하늘의 판결을 선포하고 있다(76:8).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찌로다(니다루 웨샬레무 라도나이 엘로헤이켐 콜 세비바이오 요비루 샤이 라모라)”(시76:10-11). 오늘 현실에서 당하는 국가와 개인은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 있는데 이는 용광로에 들어간 다니엘 세 친구와 같은 상황이다. 그러할지라도 시인은 ‘그 노가 장차 주를 장차 찬송하게 될 상태’로 변할 것을 노래한다.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이베초르 루아흐 네기딤 노라 레말케 아레츠)”(시76:12). 하나님의 구원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왕들에게는 가장 두려움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베쿰 라미쉐파트 엘로힘 레호쉬아 콜 아네웨 에레츠 셀라)”(시76:9). 이 온유한 자(아느웨)는 낮은자, 겸손한 자를 말하며 하나님에 대한 도덕적,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겸손하게 인내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행20:19)를 뜻한다. 이는 영적인 이스라엘, 진정으로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 자녀를 말한다. 이 시편 76편은 바로 하나님 왕, 신왕 사상을 보여주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 되신다. 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며 다스리는 영원한 왕, 통치자 되심을 가르키는 것이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히브리서 7:1-2). “그리고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브리서 6:20).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왕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어 우리를 구속하시고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신다. 그는 단번에 십자가에 드리어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었다. 제왕 시편이 이처럼 영원한 왕이 되신 그리스도의 구원 섭리를 보여주시며 그분은 신왕으로 우리에게 오늘도 다가오셔서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 이러한 자유를 추구한 분이 계시니 그는 바로 우리 민족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선교사이다.
샤를 르 젠드르(1830-1899)는 양화진 외국인 묘원에 묻혀있다. 그는 프랑스 태생의 미국인 장교이자 외교관으로 1872년부터 1875년까지 일본 제국 외무부에 고문을 지냈고, 1890년부터 1899년까지 대한 제국 고종 황제의 고문을 지냈다. 그는 프랑스 울랭에서 태어나 랭스 왕립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결국 파리 대학교를 졸업했다. 24세 나이에 그는 브뤼셀에서 클라라 빅토리아 물록과 결혼했다. 르 젠드르는 1861년 미국의 남북 전쟁에 발발하자 뉴욕 자원 보병대를 모집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1861년 그 연대의 소령으로 임관한다. 얼굴에 총을 맞아 코와 왼쪽 눈을 잃었지만, 나중에 그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표창받기도 한다. 샤를 르 장드르는 1865년 3월에 준장으로 명예 진급하였다. 1866년에는 청나라 복건성의 샤먼에서 미국 영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대만에 가서 미국 승무원 사건을 직접 조사한다. 단수이, 가오슝(타카오)와 타이완섬에서 외교 무역 문제로 일하던 중에 1872년 12월 르 젠드르는 일본 군사 고문으로 고용되어 메이지 정부에서 고위직에 고용된 최초의 외국이 되었다. 르 젠드르는 1890년까지 일본에 남아서 오쿠마시게노부의 고문으로 사적으로 일한다. 그 후에 1890년 3월 그는 일본을 떠나 고종의 고문이 되었다. 1899년 9월 1일 서울에서 뇌졸중으로 죽을 때까지 한국 조종에 머물게 된다.
르 젠드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히게 되는 이유는 고종의 고문으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에서 역할을 하며 미국인으로서 타문화권 선교를 한 점이다. 그는 미국인 아내와 이혼한 적이 없는데 1872-1873년에 도코에서 이케다 이토와 결혼한다. 이들 사이에 두 자녀가 있었다. 그는 미국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일본에 귀화하였다. 1872-75년까지 일본의 외교 고문으로 있던 중 1890년에 조선 공사였던 김가진의 도움으로 조선에 와서 내무 협판이 되었다. 그는 일본을 배척할 것을 주장하여 조선의 국가 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이선득이라는 이름을 썼다.
르 젠드르는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 후 일본의 간섭을 받은 조선 정부는 르젠드르를 해고하고자 하였다. 그는 일본에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주조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르 젠드르는 1895년 9월에 베베르와 명성 왕후 민씨 세력인 이학균과 박종화의 추천으로 궁내부 고문으로 발탁하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르젠드르는 1897년 의정부 찬성에 임명되었고, 군주권을 약화시키려는 독립 협회와 대립하고, 교전소 및 법규 규정소 임원으로 대한제국 국제를 반포하는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고종의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불란서와 미국, 일본과 대만, 한국을 오가며 궁정의 내부, 외교에 관여하며 한국 정부에 고종을 돕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선교사들과 함께 그 묘비를 알리는 이선득 선교사는 외교 정치 선교를 하게 된다. 1890년 2월 고종황제가 르젠드를 통리군국사무아문의 협판으로 임명한다. 고종은 일본 차관 도입을 통해서 청국 차관을 상환하고 관세권과 해관 운영권을 회복하자는 르젠드르의 조선부 국책이 고종의 반청자주 정책과 뜻을 같이하였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조선 정부에 외교 정책의 뜻을 받들어 일본 차관을 제공받는 일, 상해 현지 은행과 미국 은행, 미국인 자본가들과 차관 교섭, 청의 개입과 원세개의 요청받은 조선 관료들의 차관 교섭일, 제주도 인급 해역에서의 어업권, 일본 정부와 어업권 재협상 등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외교 업무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르 젠드르 선교사는 정치 선교라는 차원에서 조선의 국익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는 한국 정부의 중요 요직에서 활동하였다. 이는 외교 선교를 베풀며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서 한국의 선교사 묘지에 묻히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선교는 복합 다차원적인 차원의 정치 · 외교 선교의 르 젠드르의 선교 궤도를 보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