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의료보다 영혼 구원의 선교에 더 집중한 빈돈 선교사

  • 입력 2025.02.0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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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 이야기 (402) - 구약성경과 선교 이야기 (214)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여호와는 위대하시니(쉬르 미즈모르 리브네 코라 가돌 아도나이)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시편 48:1).

민족의 명절 설날을 보내면서 우리는 나라의 불안과 경제의 어두운 그늘이 합쳐지면서 명절 증후군까지 곳곳에서 일어나며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된다. 시편 48편은 고라의 이야기를 전한다. 하여 고라가 모세와 아론을 거슬렀던 이야기를 알게 된다. 민수기 26장 9절에서는 고라가 하나님을 반역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무리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죽었지만 고라의 후손들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서 조상들의 그 불신앙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나중에 성전 문지기(대상 9:17-19; 26:1,19), 빵을 굽는 성전 요리사로 하나님을 섬겼다(대상 9:31). 이 시편의 배경은 히스기야 시대로 앗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쳐서 성이 무너지고 유다 백성이 포로로 붙잡혀 갈 위기에 쓰여진 것이라고 본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예페 노프 미소시 콜 하아레츠)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하나님이 그 여러 공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시 48:2-3).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 성이 터가 높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성의 터가 높다고 앗시리아의 군대가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호하여서 산헤립의 군대에게서 지켜주기에 안전한 요새가 된다. 이는 앗수르 군대가 갑자기 십팔만 오천 명이 천사의 영(루아흐 말라크)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다. 이 영은 바로 구약의 성령으로서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간다. 신약의 성령은 초대 교회를 형성하고 오늘도 팔복의 복을 끼치며 하나님의 자녀를 돌보신다. 시편 48편에 여호와가 지킴으로 이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성이 되었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이 바로 이 예루살렘 성에서 보여지며 기적적으로 위기를 면하고 극적인 구원을 받게 된다. “왕들이 모여서 함께 지나갔음이여 그들이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지나갔도다 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베로아흐 카딤 테샤베르 아니요트 타르쉬쉬)”(시48:4-7). 이방 나라들은 앗수르 군대가 진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게 된다. 그래서 열방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셀라)(카아쉐르 샤마에누 켄 라이누베이르 아도나이 쩨바오트 베이르 엘로헤이누 엘로힘 예코네네하 아드 올람 셀라)”(시편 48:8). 이 난공불락의 성 예루살렘은 바로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지킨다는 믿음이 굳게 된다. 시온의 영원성과 예루살렘의 성전에 대한 불변한 신앙은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의 성전에 대한 다윗의 언약과 다윗 왕조의 영원한 언약과 연결된다. 이 성전은 마당 뜰과 성소와 지성서의 삼중 구조로 되어 있어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된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을 기대하기에 이 예루살렘 성전은 특별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 경이로운 구원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흔히 있던바 하나님 사랑으로 말미암은 구원역사를 보이며 이 하나님의 인도는 구원의 생생한 현실로 이끄는 것을 볼 수 있다(시편 44:1)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보라(소부 찌온 웨하키푸하 시페루 미제다레이하)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시48: 12-13). 고대의 전쟁에서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망대와 망대의 숫자는 중요한 요소였다. 망대의 숫자는 그 성의 힘과 군사력을 뜻하기에 군대가 망대를 공격하는 것은 중요한 공격 대상이었다. 따라서 산헤립 군대의 공격에서 시편 48편 시인은 구원받은 망대의 숫자를 세어보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이 시온성과 함께 함으로써 적의 공격에서 살아났음을 망대의 수를 통해 말한다. 느헤미야 성벽의 역사에서 주위의 이방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의 성벽 역사를 마치는 역사는 이를 기억하게 한다(느헤미야 6:5, 16절). 고대의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역사는 성을 지키시고 백성을 보호하는 믿음이 예루살렘 성의 보호와 인도하심으로 표현되고 있다. “아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키 제 엘로힘 엘로헤이누 올람 와에드 후 예나하제누 알 무트)”(시48:14).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시48:7). 여기서 다시스의 배는 가장 강력한 다시스 해군의 난파와 와해를 비교하고 있다. 적군의 군사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가장 튼튼한 배로 알려진 강력한 앗수르의 해군력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사 33장, 왕상10:22).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48:14).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끝날까지 함께 하시며, 시온의 영광처럼 인생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함께 한다는 시온 신학과 영원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영광을 보여준다. 이는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집에 대한 다윗의 성전 언약을 보여주며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준다. 이러한 인생을 살아간 선교사가 있다.

찰스 빈톤 선교사(Charles C. Vinton, 1856-1936, 빈돈)는 1895년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 레티샤와 함께 한국에 왔다. 그는 소년 때부터의료 선교사의 꿈을 가지고 의학 공부를 하였다. 후에 선교사의 부름에 응답하여 조선에 오게 된다. 그는 제중원에서 사역하면서 동시에 자택에 사설 진료소를 마련하여 1891년 9월 서민들을 치료하고 돌보았다. 동시에 그는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평양, 의주, 만주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파한다. 빈돈 선교사는 동대문에서 어려운 평민과 천민을 위해 연동교회를 설립하는데 참여하며 협력하였다. 1891년 4월 입국하여 제중원 3대 원장으로 부임하였으나 정부의 부패와 제중원 내 복음 전도를 거절함에 따라 2년 만에 사임하였다. 그리고 자택에서 개인 병원을 설치하여 환자를 돌보고 의료보다 선교에 집중하였다.

그는 성서 공회에 창설에도 참석하여 성서의 출판과 보급을 하였다. 빈톤 선교사는 이질로 사망한 존 헤론의 뒤를 이어 제중원의 원장이 되었다. 빈돈은 제중원 운영비 사용 권한을 정부에 요구하며 진료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미국 공사 허드가 빈턴과 조선 정부를 중재하여 문제는 진정되었다. 의료 사업보다는 직접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그에게 제중원에서 선교가 불가능하게 되자 제중원 구내에 교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빈턴은 조선 정부에 의해 교회 설립이 좌절되자 태업을 하였고 1891년 9월부터는 별도의 개인 진료소를 치렀으며 1893년 11월 제중원 원장직을 사임한다.

고종에게도 회개할 것을 외친 빈톤 선교사의 선지자적 사명과 열정이 사모되는 시대를 살아간다.
고종에게도 회개할 것을 외친 빈톤 선교사의 선지자적 사명과 열정이 사모되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는 문서 선교에 많은 활동을 한다. 1894년 선교사 공의회(현 성서공의회) 창설에 참여하였고, 기독교 신문 및 잡지 발간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897년 기독교 신문인 <The Christian News> 편집인을 하였고, <The Korean Mission Field> 발간의 실질적 책임자로 역할을 하였다. 성서 실행 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조선 선교 문서회의 창설에 기여하였고, 북장로교 선교회 서기로서 봉사하여 많은 회의록을 남겼다. 1895년 10월 호 <코리안 레포지토리>에서 백정 전도 활동을 진행하는 무어 선교사의 곤당골 교회 이야기를 기고하기도 하였다. 1904년에는 나병환자 실태 조사 위원으로 참가하였고, 훗날 북장로교가 나환자 구호사업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1909년 부산 나병원이 설립된다).

그는 강직한 성품을 가진 선교사로 나타난다. <제사는 저주다>라고 외치며 성도들의 제사를 강력히 반대한 기록이 있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성도들이 주일에 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하는 도구를 모두 빼앗아 물의를 일으킨 일화가 있다. 또 다른 일화는 왕궁에 가서 고종에게 회개하라고 외쳐서 잡혀간 적이 있다. <임금이 많은 궁녀를 거느린 것은 죄이므로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외친 것이다. 그는 성경을 바로 믿고 아모스, 예레미야처럼 곧은 신앙심으로 비타협의 신앙을 보이며 선교지에서 직접 선교, 정면 신앙으로 용기 있게 전한 놀라운 선교를 한 것이었다. 현재 양화진에는 그의 아내 레티샤와 3자녀가 안장되어 있다. 선교 사역을 하는 중 갑자기 어린 나이의 두 자녀가 숨지는 충격을 받게 된다. 그는 두 딸과 사랑하는 아내를 이 땅에 묻고 나중에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양화진에는 3자녀의 비문에는 쓸쓸하게도 오직 이름만 적혀있다. 선교사는 이 땅의 행복을 위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천상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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