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병들고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에스더 레어드 선교사

  • 입력 2025.01.0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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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 이야기 (398) - 구약성경과 선교 이야기 (210)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리로다(아도나이 로이 로 엑사르)”(시23:1).

새해가 밝아왔다. 을사년 새해는 뱀처럼 지혜롭게 살 일이다. 지난 갑진년 청룡의 해 나쁜 일은 다 잊어버리고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으로 살면서 주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살면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시편 23편은 시편 150편의 성시 중에 가장 애독하고 사랑하는 시편이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빈오트 대세 아르비쩨니 알메 메노호트 예나하레니)”(시23:2).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비유하여 보여주는 신뢰시이자 개인 탄식시이다. 이 개인 탄식 시편은 개인의 문제와 고난, 고통을 가지고 성전에 방문하는 시이며 개인의 병과 질곡을 가지고 있거나 정치적인 불명예나 패배의 상태에서 나오는 시이다. 곧 시편 23편은 인도와 보호를 바라는 시인의 상태나 공동체의 어려움과 위험의 상태에서 구원을 바라는 탄식과 보호시의 성격을 가지기도 한다(시73:17; 32:5; 107편).

이 시편 23편은 특별한 시편으로서 시편 51편과 같이 자연적인 시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새롭고 정한 마음, 정직한 영을 간구하는 기도자의 모습이 나오며 시편 기자의 종교적 마음의 절정이 보여준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예배의 자리에서 개인의 감정과 경험이 노출되고 있지만 제의 시편의 자리는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호와의 집’에서 그 예배의 자리를 유추할 수 있다. 시편 23편은 51편이나 42-43편에서 개인 경험과 감정, 개인의 경건성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관계에서, 개인 시편(I-form)으로서 기도의 시편이자 감사 시편이다. 찬사와 감사, 확신의 시편으로 기도자의 이의 혼합된 시이며 초기의 신앙 시편에서 전해 받은 것이다. 시편 23편이 널리 애송되는 이유는 짧지만 인생의 드라마틱한 모순을 잘 표현하며 하나님이 승리로 이끌어주시며 보호하시는 주의 모습을 잘 그려서 일 것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납프시 예소베브 에나하니 베마아겔레 쩨데크 르마안 쉐모)”(시23:3). 하나님과 나, 목자와 양의 관계가 3인칭 관점에서 처음에는 기록되고 있다. ‘그의 이름(쉐모)을 위하여’, 소생시키시고(그가 예쇼베브), 내 영혼(나프쉬)-“그 분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로 표현되어 1-3절은 1-3인칭 관계로 시인이 시를 쓰다가 4-6절은 1-2인칭 관계로 묘사하며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로 하나님을 2인칭으로 그린다. 이는 마틴 부버의 책, <나와 너(Ich und Du)>라는 책에서 밝히고 있는 바, 모든 인간관계는 ‘나와 너’와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관계, 그 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meeting, 단순한 만남)이지만 사랑과 인격적 관계는 깊은 나와 너의 관계(인격적 관계, encounter 만남)라는 것이다.

히브리시에서는 이러한 나와 너의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를 인칭 어미를 가지고 묘사하며 히브리 시인이 관계성을 표현하고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주께서(당신)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감 키 에레크 베게 짤마웨트 로 이라 라 쉐브테카 우미시안테카 헴마 여나하무니) ”(시23:4). 또 시편의 암송을 위해 그 단어의 숫자는 세어보면 ‘미즈모르 르다위드 아도나이 로이 로 엑사르’(6개 단어), 2절부터 6절까지 6개, 6개, 4절 12개, 5절 10개, 6절 10개 단어로 암송하기 좋게 손가락을 세면서 이 시를 암송하며 절대적인 하나님 신뢰를 갖고 인생을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 어찌 보면 인생의 사실과 사건을 분석하는 데는 3인칭 관점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긴밀하게 오시는 주님을 ‘나와 너’의 관계에서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주님을 시인은 놓치지 않고 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타아로크(당신) 르파나이 술칸 네게드 쪼르라이 디산타(당신이 부으시고) 바세멘 로쉬 코시 르와아). 목자로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이 원수를 무찔러 주시고 함정에서 구원해주신 경험을 감사하며 시인은 ‘보호 시편’으로서 표현한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시편들 중에 진주와 같은 시편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 시는 모든 세대와 시대에 최고의 시로서 값으로 셀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가진 시로써 서 있으며 하나님의 순수한 확신을 표현하며 어떠한 역사적인 특별한 상황에도 방해받지 않고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나 모든 시대 사람에게 신앙의 확신을 표현해 준 특출한 시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아크 토브 와헤세드 이르데푸니 콜 예메 하이 웨삽브티 브베이트 아도나이 르오레크 야밈)”(23:6). 이 감사시편은 메모리얼 기념비(추모비)에 기록되거나 가죽이나 양피지에 기록된 감사 시편처럼 ‘여호와 앞에’, 성전에 놓여 있던 것이다. 마치 영락교회에 입구에 기록된 히브리어 시편 23편 기록처럼 말이다. 시편 23편의 아름다운 시는 매일 길을 나설 때에 집에서 암송하고 나서게 하는 확신과 신뢰, 보호와 감사, 인도와 승리의 시로서 힘과 용기를 가지게 하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한다.

이러한 은혜의 삶을 살아간 주의 선교사가 있다. 에스더 레어드(Esther Jeanette Laird, 나애시덕, 1901-1968) 선교사는 미 감리회 신시내티 지부 데이튼 지방회에서 파송을 받고 1926년 2월에 25세 나이로 내한하여 원주와 대전에서 40년간 선교사로 활동한다. 그녀는 가난하고 병든 한국인에게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희생했던 사랑의 어머니였다. 에스더 레어드는 미국 오하이오주 헤어헤븐에서 출생하여 딕슨고등학교 졸업 후(1919), 1920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성서와 종교 교육을 전공했다. 모닝 선 스쿨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드류신학교와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1925년). 이때에 에스더와 함께 공부했던 한국인으로서는 김활란 박사와 유형기 등이 있다.

에스더 레어드 선교사는 내한해서 원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귀국, 1927년에서 1931년 사이 본국에서 모금하여 돌아와서 1933년 원주 기독교 여자관 관장, 원주 중고 청년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1940년 11월 16일 강제 추방될 때까지 야학교, 소녀반, 부녀반을 두고 필요한 과목들을 가르치며 운영했다. 야학교에서는 일본어, 한글, 성격, 수학, 음악, 지리 등을 가르쳤고 소녀반에서는 가사에 필수적인 탁아법, 위생학, 원예 등을 가르쳤다. 부녀반에서는 레크레이션, 노래, 재봉 등을 강의하며 아동들의 교육과 건겅에 대한 토론를 했다. 에스더는 저녁 시간에는 영어반을 조직해서 중고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청년들에게는 여가를 통하 친교나 텃밭 활용을 실천하도록 본을 보여주기도 했다. 요양원, 탁아소, 계몽 운동, 빈민구제 사업, 청소년과 부녀자 교육 등으로 밤낮없이 바빴던 레어드 선교사의 삶은 ‘나비처럼 분주하게 펼친’ 계몽 생활 사업이었다. 에스더 레어드 선교사를 사랑해서 원주 사람들이 불린 이름은 나애시덕, 나 부인, 나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추방당해 신시내티 베데스다 병원에서 부속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공인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내쉬빌 피바디 대학에서 공중 보건학을 공부하고 고향 인근의 해밀턴에서 내한할 때까지 간호사로 근무했다. 해방되어 1947년 다시 선교지로 와서 원주에서 선교 사업을 계속하였다. 그 후 동란으로 떠났다가 1952년 내한 대전에서 기독교 사회관을 설립한 후 탁아소, 육아원, 나병환자, 자모클럽, 전쟁미망인의 직업 보도(재봉 수예 편물 등), 대전에서 기독교 결핵 요양원을 설립한 후 20년간 1000여명을 치료하였다. 원주 제일 교회 정원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그에게 교육받아 공주 사범대학장을 지낸 정시태 등 제자들이 세워준 것)있다.

1961년 에스더 레어드 선교사의 회갑 잔치 때 어느 분이 에스더를 가리켜서 그녀는 “유머가 넘쳐서 곧 묘한 대꾸로 되받게 하는 분,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는 분, 함께 일하기도 또 함께 놀기도 좋은 분, 에스더보다 더 아름다운 기독교인이 또 있으랴!”라고 축하했다. 에스더 레어드 선교사는 사랑의 화신으로 한국인들에게 예수 사랑을 심어주고 간 영원한 그리스도인 에스더가 되었다. “젖 없는 아기 찾아 밤새 돌보며 깊은 병 앓는 이들을 몸소 간호하셨고 길 잃은 젊은이들 꿈도 펴게 하시고 고달픈 이 쉴 집도 여럿 세우셨으니 크고도 따뜻하였어라 당신의 손길 당신 스스로는 병도 나이도 잊으신 채 한결같이 일에만 열중하시더니 아 아! 이곳 다시 못 오시고 끝내 가셨군요. 주님의 십자가를 늘 지신 당신의 뜻 사랑의 밀알 되어 이 땅을 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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