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시)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리쉐로모 엘로힘 미쉬파테이카 레메렉 텐 웨찌드콰테카 레벤 멜렉)”(시72:1).
역사는 과거로 회귀하는가. 얼마 전 계엄령 선포로 나라가 떠들썩하였다. 선거 문제와 여소야대의 정쟁(政爭)에서 비롯된 일로 시끄럽다. 나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나뉘고, 진보와 보수의 두 세력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사회 전반에 불신과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 절실히 요구되고 자유와 평화의 사상이 강물처럼 흘러내려야 하는 시점에 있다.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야딘 암메카 베체데크 와아니예이카 베미쉬파트)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시72:2-3). 시편 72편은 엘로힘 시편(시42-83편)이며 초기 시편으로서 시편 기자가 독특하게 하나님(엘로힘)이름을 사용한다. 이는 시편 1-41편의 여호와 시편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이 272번 나오며(표제어와 송영이 포함되면 278번, 여호와 이름은 15번; 시편 84-89편에서는 여호와 이름이 31번 나온다, 7번은 엘로힘, 그리고 시편 90-150편에서는 여호와 이름이 339번, 엘로힘이 6번 나온다. 이러한 이름의 빈도수가 역전된다. 시편 42-83편에서는 여호와 이름이 단지 43번 사용된다-시편 72:18절 송영포함; 반면 엘로힘 하나님은 200번이나 나온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이 기도가 끝나니라(칼루 테필로트 다위드 벤 이샤이)”(시72:18-20). 이 왕정 시편은 시편 2; 18; 20; 21; 45; 72; 89; 101; 110; 132; 144.1-11등이다. 이 시편은 분명한 왕의 언급을 통해 왕정 시편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콜 멜라팀 콜 고임 야아베두후)”(시62:10-11). 시편 2편과 110편이 왕즉위 시편인데 72편과 101편이 이 시편과 같이 왕즉위 시편의 배경에 둘 수 있는 신적 신탁으로서, 왕을 포함한 신탁을 제시한다.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위히 웨이텐 로 미즈하브 세바 웨이트팔렐 바아도 타미드 콜 하욤 예바라케네후)”(시72:15). 시편 72편은 시편 101; 21; 132편과 같이 특별한 경우의 왕정 시편이며 왕 통치의 이상화된 상(像)을 보여주며 가난하고 압박받는 자를 위한 사회적인 정의의 이상을 강조한다(시편 72:4; 12-14). 여기서 왕의 통치의 우주적인 지배의 범위와 일반적인 번영의 정신과 지배적인 복지 정신은 왕 즉위 의식의 배경에서 나온다.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이쉬포트 아니예 암 요쉬아 리베네 에비온 위다케 오쉐크)”(시72:3-4).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이흐라흐 베야마이오짜디크 웨로브 샬롬 아드 베리 야레아흐) 그가 바다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시72:7-9).
이러한 메시아적 왕직은 그리스도 예수의 희년의 선포를 통해 성취되며 그 분은 영원한 왕으로서 (레25:8-22; 사61:1-2; 눅4:16-21) 이 땅에 오신다. 그는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처럼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오신다. 솔로몬의 시편은 시127편과 함께 ‘왕의 아들’로써 세바와 다시스 왕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왕상 10장). 왕에게 조공을 드리고 왕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는 일은 바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며 중보기도하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함을 보여준다(시72:15). 하여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에히 쉐모 레오람 리프네 세메쉬 야닌 이논 쉐모 웨이트 바레쿠 보 콜 고임 예아쉐루후)”(시72:17).
시편의 구성은 다섯 번, 5권으로 구성되며(시1-41; 42-72; 73-89; 90-101; 107-150). 송영으로 편집적인 종결의 장치를 하며 오경 다섯권의 형태를 모방하여 송영으로 그 책의 각각 결론을 삼는다(시41:13; 72:18-19; 89:52; 106:48; 150편 송영 시편, ‘주를 찬양하라’).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시72:20). 시편 2권의 결론으로서 시편 1-2권이 다윗 왕의 시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며 다윗의 왕권을 강조하며 솔로몬이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인생에서는 후손이 바로 아버지의 신앙 유산을 이어받아서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이 축복임을 말하며 신앙인들에게는 영적 유산을 영적 자녀들에게 전해서 아름다운 삶 곧 바울의 영성으로 신앙인이 교회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에레드 케마타르 알 게즈 키르비빔 자르지프 아레츠)...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레파나이오 이케레우 찌임 웨오예바이 아파르 예라헤쿠) ...산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시72:6, 9, 16). 이처럼 출애굽 시편, 제 2권의 끝이 솔로몬의 시이며 시편 72편의 제왕 시편으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이 있으니 그들의 발걸음은 조선의 새벽을 여는 거룩한 발자취가 되었다.
맥클레이(Robert Sameul Maclay, 1824-1907, 맥리화) 선교사는 한국 정주의 선교사로 한국의 개화를 연 선교를 하였다. 그는 김옥균과 같은 조선의 유망한 청년들과 만나 교류하며 정부와 접촉하였다. 그는 김옥균과 친분이 두터워서 학교와 병원을 설립 운영할 수 있는 선교 사업을 허락받는다. 맥클레이는 1884년 고종 황제에게 첫 윤허를 받으며, 한국 정부에 공식적인 인정을 받고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로 들어온 선교사가 되었다. 매클레이는 한국에 정주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스트랜튼,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같은 선교사로, 사역할 수 있도록 그 근거를 마련하였다. 매클레이가 선교 활동에 대한 정부의 허락을 받은 것은 선교사적으로 볼 때 한국 선교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고 본격적인 선교 역사의 시작을 만든 것이다. 따라서 한국 선교 역사, 교회사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맥클레이는 1824년 2월 7일, 펜실베니아 주 콩코드에서 태어나서 가죽 가공 사업을 하는 부모로부터 신앙교육을 받고 1841년 디킨슨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1845년 7월 졸업식에서 “규칙과 삶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졸업 연설을 했다. 맥클레이는 미국에서 짧은 목회를 뒤로 하고, 1847년 9월 10일 중국 선교사로 푸저우에 선교 활동을 하게 된다. 맥클레이는 1850년 푸저우 여자 고등학교를 설립하고, 1873년 감리교 선교회의 일본 미션 총리에 임명되어 요코하마 선교 활동을 한다. 그는 1882년 5월에 조선과 미국이 수교한 후 다음해 4월에 조선 주재 미국 초대 공사로서 조선에 부임하여 오게 된다. 1883년 8월 사절단(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하는데, 이 때 해외 선교부 지도급 인사 중 가우처 박사가 조선 사절단을 만나 교류하며 조선 선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 1883년 후반기에 일본에서 활동하는 미국 선교사들과 만나는데 일본에 체류 중에 개종한 조선 관리 이수정이 미국 개신교계에 공개 서한을 통해 선교사 파송을 요청한다. 이 공개 서한이 선교 잡지에 실려 각지에서 많은 선교 헌금이 접수되었다.
그래서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일본에 맥클레이에게 한국의 선교 실정을 살펴볼 것을 요청한다. 그 때에 1884년 6월 8일, 그는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23일 인천에 도착하여 24일 한양 미국 공사관에 머물게 된다. 이는 한국 선교사로서, 개신교 성직자로서는 처음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내한한 것이다. 이후 같은 해 7월 3일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으로부터 선교회 사업(교육과 의료)에 관하여 그는 허락을 얻어낸 것이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나 조선 정국이 어수선하자 선교사 파송 사업은 지연되었으나 일단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 메리 스크랜튼, 아펜젤러를 일본으로 불러, 이수정에게 한국어를 배우게 한다. 이들은 1885년 4월, 조선에 입국한 후 이화학당, 배재 학당을 설립하고 여러 병원을 세우며 선교 사업을 펼친다. 맥클레이, 맥리화 선교사는 한국 선교 책임자 자리를 거절한 후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신약성서> 번역 위원이 되어 일하며 도코 에이와 학교의 총리(1883-1888)로 취임하여,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맥클레이는 1889년에 다시 귀국해 로스 엔젤레스 근교에 신학교를 설힙하고 교장이 된다. 저서에 <각세문>(1856), <수세례지약>(1857), <신덕통론>(1865) 등을 저술한다. 맥클레이 선교사를 통해, 선교는 우주적 하나님의 마음과 눈을 가지고 자유롭게 보며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인 선교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기도하면서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함을 느끼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