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아크 토브 와헤세드 이르데푸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고해(苦海)의 바다에 평안의 배를 띄우고 살아가는 것이다. 수많은 풍랑이 다가올 때 주님을 의지하는 배들은 그 풍랑과 싸워 이기며 거친 파도를 헤쳐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시편 중에 하나는 시편 23편이다. 이 시편은 많은 신앙인들이 애송하는 시로서 암송하며 자주 찬양하는 노래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쉬브테카 우미쉬안테카 헴마 예나하무니)”(시23:4). 사망의 골짜기를 거니는 오늘의 우리 삶은 바로 재앙과 해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삶이다. 이는 바로 ‘임마누엘 신앙’, 곧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마치 갓난아이가 엄마의 품에 있는 것처럼, 아이가 아빠와 함께 손을 잡고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만사형통의 삶처럼 말이다.
시편 23편은 개인 탄식시로서 시편 51편과 함께 특별한 시로 언급되며 새롭고 정한 마음, 의로운 영을 간구하는 기도자의 시이다. 거룩한 영으로 시편 기자는 종교적 절정을 표현한다. 참된 개인의 경건심과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본질적 요소를 보여주며 기도자와 죄의 고백이 개인적 본성의 간구의 요소가 되고, 깊은 개인적 영성이 공적인 예배와 회중의 관심이 된다. 이는 전체적으로 개인에게 그 고통의 극복이 되려면 후에 추가된 뒤 두 절에 선언되듯이 대적자의 제거가 이뤄져야 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디샨타 바쉐멘 로쉬 코시 례와야)”(시23:5). 이 시편 23편은 시편 51편과 더불어 개인 시편(I 시편)으로서 연관되며 시편 22편(병 시편)과 시편 73편(감사 시편, 병고 후에 시편)과 관련되어 연결된다. 이는 예배자가 공동체와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고 위협하는 질병과 고통을 위해 선포하며 개인적인 시로 표현한다. 결국 의인과, 경건한 사람이 감사하며, 끝에 성전과 연관된 행복한 삶으로 끝나는 구조를 보여준다(시50편, 시69편). “선함(복)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웨샤브티 베베이트 아도나이 레오레크 야밈)”(시23:6).
또 시편 23편은 시 51편과 42-43편과 더불어 개인 체험과 감정, 아주 개인적인 경건과 연관되어 표현되더라도 이것이 바로 제의와 연관된 시라는 사실에 주목한다(궁켈). 시편 51편과 시편 23편은 공동체와 개인적인 시의 표현으로 나타나지만 공동체 제의 시편이며 제의 찬양시편으로 보인다. 따라서 동물 제의 제사와 감사시편, 가장 좋은 제물을 바치는 시편으로서 성격을 지닌다(모빙켈). 개인적 감사시편인 시편 23편은 확신의 시편으로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의 보호시편이다. 이는 위험에서 보호하는 하나님과 구원의 체험 후에 감사하는 감사시편으로서 그 기능을 한다. 시편의 진주와 같은 이 시편은 모든 세대가 그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가진 하나님의 확신을 순수하게 표현한 시로서 신앙의 확신을 적절하게 표현하며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서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언제든지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잘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 시편 23편에는 전통주의와 개인주의 성격(개인성)을 잘 보여주며 하나님이 시인 개인의 하나님인 것을 잘 묘사해주고 있다. 전통적인 목자와 양의 개념으로 표현하며 주님이 목자처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며 양처럼 잠시도 한 눈을 팔 수 없이 보호해야 할 대상임을 말한다. 매일 영적, 개인적, 물리적 삶은 바로 하나님과 기도자 사이에 관계를 보여주며 전통적인 시편 이미지에 있어 ‘사망의 골짜기나 음침한 골짜기’는 정신적 위험과 죽음의 외로움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표현해주고 있다.
시편 23편은 히브리어의 인칭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시이다. 마틴 부버가 <나와 너, Ich und Dich)>라는 책에서 모든 인간관계는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와 나와 그것의 비인격적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랑과 인격적인 만남(Encounter)은 나와 너의 관계라고 하면, 그 외에 단순한 만남(나와 그것의 관계)은 그저 모임과 데이트(Meeting)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 시편에서도 하나님의 3인칭 관계로 멀리서 인도하시는 분이 2인칭 하나님, 당신으로 다가와서 나를 사랑하고 인도하며 양의 절대적인 보호의 인물인 목자로서 인도하시는 모습을 그린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시23:2). “주께서(당신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시 23:5). 결국 이렇게 인격적인 하나님의 인도로 내가 영원한 하나님,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는 고백을 하며 끝난다(시편 23:6절).
이처럼 시편 23편은 시편 73, 103편처럼 보호와 감사 시편으로서 ‘확신의 시편’의 특별한 그룹을 위한 시로서 특별한 어체와 양식으로 표현된다. 이는 최고의 시로서 종교적인 시적 측면에서 전체적 시편 중에 가장 뛰어난 시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나프쉬 예소베브 야네헤니 베마에겔레 쩨데크 레마안 쉐모)”(시23:3). 인생의 삶 속에 영혼의 부활, 소생은 바로 우리가 쉼과 편안함과 양식의 풍요를 통해 이뤄지는데 이를 잘 표현해준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3). 아름다운 서정시와 인생의 서사시가 같이 포괄된 시는 이 시편처럼 종교적, 신앙적인 시와 결부되어 확신과 신념으로 이어지는 시이다. 이는 이처럼 영원의 시로 이어질 때, 그 아름다운 영원한 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시, 평강의 삶을 살아간 선교사가 있다. 우리암(프랭크 윌리암스, 1883-1962) 선교사는 23세 청년으로, 아내 앨리스 베이트와 함께 인천에 1906년에 도착한다. 우리암 선교사는 장티푸스로 사망한 로버트 샤프 선교사 후임으로 공주 선교부 책임자로 부임한다. 우리암 선교사는 1940년 일제 강압으로 추방되기까지 34년을 충남 공주를 중심으로 선교를 한다. 그는 한국 사랑을 지극히 사랑하여서 미국 이름보다 우리암이리는 불리는 것을 좋아했고 아들을 ‘조선의 광복을 염원하는 뜻에서 ‘우광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선교의 역점으로 힘썼던 것은 교육 선교로서 공주의 기독교 교육에 힘써서 인재를 양성할 학교, 공주 영명 중고교(1942강제 폐교)를 세운다. 이는 근대 교육을 한 샤프 선교사와 사애리시 선교사가 세운 명설 남학당, 명선 여학당(최초)의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합법적인 인가를 받아 1906년 10월 15일 공주 영명 중고등학교를 세운다.
이 학교를 통해 1만 7천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하는데 독립 운동가 황인식, 조병옥 선생, 유관순 열사, 유열사의 오빠이자 독립 운동가 유우석(1899-1968), 최초의 여자 경찰서장 노마리아, 최초의 여성 목사 전밀라 등 10명의 감리회 감독을 배출한다. 이 학교의 교육목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을 기르자’와 ‘나라와 민족, 겨레를 위해 몸 바칠 수 있는 애국자를 기른다’라는 목표로 교육하여 독립 운동을 위한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우리암 교장 선생님께서 지원해준다. 우리암 선교사는 1962년 79세 나이로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다.
“우리암 선교사는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뒤 인도 가지아바드에 농업학교를 설립해 5년간 머물렀는데, 이때 인도에 있던 영국군 사령부에서 광복군들을 상대로 영어 교육을 했다”고 전한다. “당시 버마(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에 배속된 광복군이 일제 통신을 감청하는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암 선교사가 뒷받침했다‘고 전한다. 추방당해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도왔고 특히 유관순 열사를 키운 교육과 자신의 아들 우광복이 한국 독립과 자유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자가 되게 한 열정은 귀감이 된다. 학교에서 1937년, 일제시대에 우리암 선교사 기림 흉상 제막식을 한다 그 때에 독립 운동의 33인의 33개 돌을 다듬은 것은 아직도 남아 있다. “1937년 제자들이 만든 기존 흉상은 일제가 녹여 무기를 만드는데 썼고, 광복 뒤 다시 만들어졌다. 증손녀인 그레고리 목사(57)는 최근에 기존 흉상 받침대는 3.1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을 기려 돌 33개를 다듬어 넣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뜻을 되살리려 가족들이 비용을 모아 현재 흉상 받침대도 바꿀 예정”이다.
우리암 선교사는 일제의 신사 참배요구를 거부하다가 1940년에 일제에 의해 추방된다. 이 영명학교는 광복 후 1949년 다시 문을 열었다. 한국의 농촌 근대화에 힘썼던 우리암 선교사는 광복 뒤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서 미군정 농업 고문으로 5년간 활동하며 선교를 이어갔다. 특히 그의 아들 우광복(1907-1994)을 통해 한국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게 한다.
이처럼 선교를, 대를 이어서 하면서 그는 아들 우광복을, 하나님의 선교에 크게 쓰임을 받게 하는 데, 이는 우리암 선교사의 놀라운 선교가 되었다. 우광복, 그는 공주 지역의 가장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며 우리암 선교사는 그 아버지로 한국 근대화를 이끈 대한민국 근대사에 중심에 남는 인물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