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3.1운동 34번째 민족 대표 석호필 선교사

  • 입력 2025.02.2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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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 이야기 (405) - 구약성경과 선교 이야기 (217)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아도나이 욤 욤 야아마스 라누)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셀라)”(시68:19).

우수가 막 지났는데 아직도 추위는 누그러들 기세가 아니다. 그래도 봄은 다가오고 입학식이 곧 있게 되니 신입생들과 각 학급의 새내기들은 새로운 학년의 꿈으로 설레고 있다. 새 꿈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소망 중에 그 참 꿈이 있기에 우리는 그의 보좌, 그의 성전으로 나가게 된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아비 예토밈 웨다얀 알마노토 엘로힘 비메온 카드쇼)”(시68:5).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하야트카 야쉐부 바흐 타킨 베토바트카 레아니 엘로힘)”(시68:10).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라마 테라쩨둔 하림 가베누님 하하르 하마드 엘로힘)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같도다(레케브 엘로힘 리보타임 알페 쉰안 아도나이 밤 시나이 바코데쉬)”(시68:16, 17).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메헤카레카 알 예루살람 레카 요비루 메라킴 샤이)”(시68:29). 이스라엘은 그 축복이 예루살렘, 곧 시온에서 오며 그 성전에서 온다고 믿는다.

이 예루살렘 성전 예배는 시편 23:6; 26:8; 27:4; 63:2; 96:6; 122:1 등이며 시편 24; 68; 118; 132편은 예루살렘 성전 제의의 과정을 암시하며, 시편 48:12절은 시온 산의 성벽을 순례하며 그 걷는 장면을 묘사한다. 번제나 언약 희생 제의나 자원나, 춤추며 노래하는 장면이나 다양한 음악 악기를 언급한다(시편 4; 20; 27; 50; 54; 30; 87; 149; 150; 9; 30; 33; 47; 33; 47; 81; 98; 150편). 우리의 시편 68편은 찬양 시편으로서 탄식에서 시작하는 시편이, 그 절정에는 찬양(테힐림의 찬양) 시편으로 끝난다(시편 8; 19; 29; 33; 46-48; 65; 66; 68; 76; 84; 93; 95-100; 103-104; 105; 111; 113-114; 117; 122; 134-36; 145-50편). “소고치는 처녀들 중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뒤 따르나이다(키드무 샤림 아하르 노게님 베토크 알라모트 토페포트)”(시68:25). “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셀라)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테누 오즈 레로힘 알 이스라엘 가아와토 웨우조 바쉐하킴)”(시68:32-34).

시편 68편은 왕 즉위 시편으로서 장막절이나 신년 축제 때에 여호와의 왕권을 축하하며 법궤를 옮겨오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야쿰 엘로힘 야푸쭈 오예바이오 웨야누수 메사네아이오 미파나이오)”(시68:1).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베야흐 쉐모 웨일주 레파나이오)”(시68:4). 표제어가 다윗의 시편이라고 말하며 이는 우가릿 문서에 나오는 ‘바알에 대하여(바알에 속한 시)’하고 비교되는 것이다. 다윗 시대에 장막절에 예루살렘으로 거룩한 법궤를 가져오는 때에 이 법궤가 성소에 들어 온 것을 기념한다. 이는 여호와의 권능과 영광, 임재를 말한다(시68:1, 18; 24:7-10; 47:5).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웨아프 솔레림 리쉐콘 야흐 엘로힘)”(시68:18).

특히 시편 68편은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말하며, 특히 출애굽의 역사를 언급하며 모세의 인도와 광야에서의 방황을 다룬다.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셀라)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에레츠 라아샤 아프 샤마임 나트푸 미페네 엘로힘 제 시나이 미프네 엘로힘 엘로헤 이스라엘)”(시68:7-8). 엘로힘 하나님의 칭호가 초기 시편 시작에서 그 시편의 찬양을 보여주고 있다(시68:1, 7, 8). 여기서 바로 시편 기자는 시편 68: 29, 31, 32절을 통해 보편주의, 우주주의, 그 세계성을 말하며 이방인들이 미래에 여호와께 복종하고 돌아올 것을 노래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에에타이우 하쉐마님 민니 미쯔라임 쿠쉬 타리츠 야다이오 레로힘)”(시68:29, 31). 다윗의 시편 68-70(찬양-탄식-탄식)편은 한 단위의 다윗 시편으로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시에 해당된다. 시편 61-65편은 인간-왕의 간구라고 하면, 시편 65-68편은 하나님-왕의 다스림을 말한다. 결국 인생은 하나님을 찾는 가운데 그 문제 해결에 이르며 시편 68편은 그 성전과 성소(교회)에서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을 만나야 함을 시편 기자는 가르쳐 준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후 노텐 오즈 웨타아쭈모트 라암 바루크 엘로힘)”(시68:35).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 찬양의 인생을 살아간 분이 계시다.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 석호필(石虎弼))선교사는 에비슨 선교사의 그 선교 부름을 받고 1916년 봄에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 11월에 오게 된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였다. 석호필 선교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목원홍부터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강의한다. 그는 1917년에 한국에 온 지 1년만에 조선 감리교회에서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이름도 석호필로 지어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표현하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한국의 여러 인사와 교제를 넓히며 YMCA 총무직을 수행하던 월남 이상재 선생과 김정혜 여사를 만나 배우며 그분을 존경하게 된다. 특히 선교사는 뒷날에 김정혜 여사를 수양 어머니이자 사모로 섬겼다.

왼쪽 첫 번째 석호필 선교사에게 영향을 준 에비슨 선교사, 월남 이상재 선생
왼쪽 첫 번째 석호필 선교사에게 영향을 준 에비슨 선교사, 월남 이상재 선생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우며 1919년 2월 5일 삼일 운동을 준비하는 이갑성을 몰래 만나며 3.1운동을 위한 해외 정세 파악하는 일을 맡게 된다. 석호필 선교사는 이갑성의 의뢰를 따라 세브란스 제약부에서 사진을 찍어 해외에 알린다. 일본군이 제암리 주민들을 제암리 교회에 몰아놓고 학살 사건을 일으킨 것을 보도하며 잿더미가 된 현장을 ‘일본의 만행에 대한 분노로’ 떨리는 손으로 촬영하여 제암리/수촌리에서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만행을 고발한다. 스코필드는 이와 더불어 그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일도 했다.

석호필 선교사는 5월 일본이 운영하는 영자 신문 ‘서울프레스지’(영어)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엄영애 등이 갇혀 있던 서대문 형무소 8호실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하였다. 그가 활발한 독립 운동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영일동맹으로 말미암아 영국계 캐나다 사람인 스코필드를 일본에서는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20년 4월 살해의 위협을 받게 되자 그는 세브란스 병원의 계약을 연장하지 못하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끌 수 없는 불꽃’이라는 견문록을 쓰자 그해 4월 암살 미수 사건이 그의 숙소에서 일어나게 된다. 그는 시간이 흘러 1958년 독립 후에 한국에 다시 와서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에서 일하게 되며 수의 병리학을 맡게 된다. 1959년 한국일보에 2.4 정치 파동에 관한 소견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캐나다에 일시 귀국하였다 그해 9월에 돌아와서 ‘스코필드 기금’을 마련하여 선교 후원금을 통한 선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에비슨 선교사의 요청으로 한국에 와서 3.1운동의 민족 대표 34인이 되어 외국인 최초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다. 스코필드 선교사를 통해 진정한 선교는 그 나라 그 민족, 선교지의 백성들의 뜻과 마음을 읽고 그대로 실천하는 삶인 것을 우리는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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