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중심전도 -오스카 톰슨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서울신대신학박사, 본헤럴드대표, 춘천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 늘푸른작은도서관관장(구리) 등

관계란 언어는 아주 매력적이고, 삶을 풍성하게 연결하는 사다리이다. 관계는 사랑이란 단어를 전달해주는 매개체이다. 사랑은 관계라는 선로를 통해서 움직이게 된다.

우리 삶속에서 불행했던 기억을 떠올려보자. 불행했던 기억의 저장을 다시 열어보면 다양한 위기와 상처들로 인해 깨어진 관계가 있다. 파탄된 일터, 분열된 가정, 금이 간 우정, 분노와 상처로 얼룩져있는 교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느끼는 것은 관계가 깨어져있다는 것이다. 깨어진 관계속에서는 기쁨도 능력도 애정도 관심도 사라져버린다. 철저하게 증오하고 분노하고 아파한다.

사진, 페북에서 다운받은 것임
사진, 페북에서 다운받은 것임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해보라. 포근하고 따사로운 부모와 함께 하였을 때, 함께 떠들썩하게 웃고 즐겁게 지냈던 시절, 사랑하는 사람과 밤을 새워 함께 걸었던 시간들, 서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했던 그 아련한 추억들,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누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함께 중보했던 때를 기억해보라.

이런때는 관계가 좋았기 때문이다. 관계가 좋을 때는 모든 것을 함께 한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품어준다. 이것이 건강한 바른 관계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오스카 톰슨은 사회가 건강한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중단할 때, “그 사회는 퇴폐적인 것이 될것입니다. 태도는 거칠고 천박스럽게 됩니다. 평범한 예의 범절도 곧 망각해버립니다. 마음은 냉냉하게 되어, 감사하는 표현마저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복음도 관계의 노선을 따라 흐른다.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우물가의 여인은 그녀의 마을로, 고넬료는 가족에게, 거라사인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정신이 온전해졌을 때 예수님은 친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신약의 전도 방법은 이미 수립된 관계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

오스카 톰슨은 그의 저서 [관계중심전도]에서 일곱개의 동심원을 그렸다. 1자아’, 2가족’, 3친척’, 4친한 친구들’, 5이웃-사업동료’, 6아는 사람들’, 7사람×’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향권아래 있는 사람들에 대해 복음적 책임을 담당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원2에서 원6까지 파손된 관계들이 있기 때문에 양심상 그것을 뛰어넘어 복음을 원7로 직행한다. 파손된 관계속에서는 복음이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7로 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결실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아픔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러면 파괴된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오스카 톰슨은 한 마디로 정의한다. 사랑이란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사랑이란 단어를 떠올릴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나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사람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희랍어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아가페적인 의미로 번역할 때, 그 사랑은 감정에 근거한 사랑이 아니다.

아가페란 여기에 필요가 있으니, 내가 그 필요를 채우겠다는 순수한 결단이요 의지의 총합이다. 아가페의 사랑은 십자가의 결정체였다. 하나님이 십자가로 아들 예수님을 보낼때 어떤 이기적 감정을 가지고 보낸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필요 때문이었다. 죄인의 마음을 아셨기에 그분은 하늘의 긍휼로 우리를 품으셨다.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까? 우리의 동심원안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품어야 할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우리의 원수를 대하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접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선택한 사람들의 내려놓음이요 순종이요 거룩한 헌신의 길이다.

예수님은 구약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해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사랑을 할 때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웃 사랑의 기준은 내 몸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와 가정과 일터가 세워지는 축복의 단어인 것을 안다.

한번 이 가을에 십자가의 정신으로 실천해보면 어떨까? 관계의 회복을 통해 주시는 따스한 주님의 공기를 경험해보라. 코로나로 힘든 이웃들에게 십자가의 정신을 흘러보낸다면 관계는 복원될것이다. 코로나로 전도의 거룩한 사명을 버린다면 너무 큰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로 다가온다. 오히려 코로나 시절 전도를 해야 한다. 이때 전도하지 아니하면 언제 전도할 수 있겠는가?

동료목사의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다. 부교역자들에게 '코로나로 힘든 이때에 목회를 하지 아니하면 언제하냐고?' 바로 코로나 시절이 생명걸고 목회할때라고 한다. 이때를 위해서 목회자가 된 것이 아닌가? 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부교육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고난의 계절에 교회가 필요하다. 바로 이때가 기도할때이고 말씀붙들고 씨름할때이고, 바로 전도할때이다. 지금이 적기이다.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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