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주 목사의 호스피스 이야기 (8)

호스피스 돌봄의 궁극 목표는 평안이다. 평안은 호스피스 돌봄의 핵심이고 핵심 중 핵심은 죽음의 긍정적 수용이다.

4) 희망의 추구(b)

- 긍정적 수용(1)

두려울 수밖에 없는 죽음은 종교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의 핵심 과제는 다가오는 죽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어야 한다.

* < 호스피스 돌봄의 궁극의 목표는 평안이다 >

전인적 인간의 건강은 편안(便安)과 평안(平安)의 조화에 있다. 편안은 육체적이고, 평안은 영적이다. 그런데 육체는 최악의 상황으로 무너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주께서 계획하고 계신 시간까지는 해야 할 일도 있다(참고: 전장 의미 추구에서 시간의 의미’).

그 때까지는 어떻게라도 생존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때 또 다른 축(영혼)을 극대화시켜 주어야 한다. 마치 사고로 한쪽 다리에 상처를 입어 걷기가 힘들어 진다면 또 다른 한쪽 다리에 온 체중을 싣고서라도 걷게 되듯이 말이다.

평안의 극대화를 취하기 위해서는 a ‘지난 날들의 깔끔한 정리b ‘미래의 확실한 보장이 이루어 져야 한다.

* ‘지난날들의 깔끔한 정리의미 추구’, ‘용서와 화해’ ‘사랑 추구이라고 한다면,

* ‘미래의 확실한 보장이란, 곧 구원을 의미한다.

호스피스 사역 '위로 너머 궁극의 평안으로 안내'
호스피스 사역 '위로 너머 궁극의 평안으로 안내'

가령. 지난날에 대한 정리가 아무리 잘 되었다고 해도 미래가 불확실하다면(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과연 평안할 수가 있겠는가?

모든 종교가 구원의 필요성을 공감하고는 있지만, 방법론에 있어서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 종교의 핵심과제가 죽음이라면, 종교 선택의 기준은 당연히 어느 종교가 합리적이고도 희망적인가에 두어야 한다.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일찍이 국내 다른 종교 호스피스 기관들의 영적 돌봄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왔다.

다 종교 사회에서 다른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예의에도 벗어난 일일 수 있으니 구체적 언급은 삼가겠다. 하지만, 필자 개인적으로 희망과 관련하여서도 기독교가 역시 가장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더욱 감사하고 있다. 특히 필자는 국립 암센터가 주관하는 호스피스완화의료 표준교재 공동 저자이며, 전문인 교육 교육자이며, ‘영적 돌봄 멘토로 쓰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구원관을 소개할 기회가 주어지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직접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왔노라“(2:15) 하시면서 오신 목적이 죽음의 두려움으로 부터 자유케 함에 있으심을 분명히 하셨다. 대안은 예수님 외에는 없다(4:12)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다 두려워한다. 그동안 많은 분들을 섬기는 가운데 목회자도 많았고, 중직자도 많았지만, 죽음 앞에서는 대동소이했다. 본능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대부분이 평소 죽음 준비에 그만큼 소홀히 한 탓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평소부터 죽음 과정에 대한 그만큼의 관심과 준비가 필요하다. ‘인생의 연착륙을 돕는 호스피스 사역에 대한 사명은 교회 지도자들의 사명 중 핵심 사명이다. 자신을 포함한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죽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사역을 은사차원으로 이해하는 주변의 몰이해를 본다. 언젠가 지인으로부터 목사님은 호스피스를 오래도 하시는 군요. 나는 은사가 없어서...”하는 분을 보았다. 씁쓸했지만 대응하지 않았다. 얼마를 지난 후, 그분도 암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건강한 사람이 암을 얻었을 때의 심리상태는 일단 말기환자와 같아진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본다는 뜻이다.

필자가 호스피스 사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몇 가지 동기 중 하나는 바로 필자 자신이 이러한 이해부족으로 인한 실수와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목회에 어려움을 겪을 때, 그토록 외롭고 서글픈 시기에 함께 해 준 너무도 고마운 성도님이 암을 얻으셨다. 차량이 없던 그 가정에 교회 차량으로 병원을 모시고 다니는 등 위로를 해 드리곤 했지만, 안타깝게도 끝내는 떠나시게 되었다. 그런데 필자는 임종하시기 하루 전까지 치유기적만을 위해서 눈물의 기도를 드렸고, “주여 이 병든 몸을 지금 고쳐 주소서!”를 목이 쉬도록 불렀다. 당시의 필자는 그것이 목회자로써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목회자였고, 주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도를 간절히(?)만 드린 목사였다.

나는 워낙 진실하신 성도님의 구원을 확신한다. 하지만 마지막 과정에서의 삶의 질에 대해서는 목회자로써 자신 있게 말씀드리기가 죄송스럽다. 엄청나게 비가 쏟아지는 날. 정성껏 장례식(매장)은 치러드려서 가족들로부터 고마워하는 인사를 받기도 하였지만, 내 마음 속 아쉬움과 미안함이 여전히 남는 장례식이었다.

마지막 날. 방문을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성도님의 눈길이 지금도 선하다.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 필자는 천사가 흠모할 만한 호스피스 사역을 만나게 된 것이다.

(무료 유튜브 강좌 예심 아카데미’ 95일 개강. 문의: 031-443-2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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