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왔을 때 빛이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때 어둠이 없었다”

사진 : 민경선선교사
사진 : 민경선선교사

영국의 브리스톨은 감리교회의 시작이며, 못자리이며, 정신적 고향이다. 브리스톨은 웨슬레의 정신이 깃든 최초의 교회가 뉴 룸(NEW ROOM)이다. 뉴 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감리교 건물이다. 뉴 룸에서 동성결혼을 주최하고, 주례하고,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교회가 세속화의 물결에 도전받으며 성경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

감리교회의 첫 번째 교회당인 브리스톨은 17세기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에서 이주해온 위그노들이 믿음으로 세운 지역이다. 위그노들은 오직 바른 신앙을 지키고 후손들에게 이어가겠다는 한 가지 비전으로 고향을 떠나 고난의 삶을 기쁨으로 가졌던 분들이다. 개신교신앙의 선조들의 숨결이 깃든 지역이다. 후손들은 그 숭고한 성경의 가치와 선조들의 믿음의 유산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고 말았다. 아주 안타까운 현실이다.

세속화의 물결이 교회에 당연하게 흘러들어오고 있다. 교회는 세속화의 물결을 막아내고 다시 순결한 복음으로 세워질 수 있을까? 그 시작점을 주님이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레위지파 알패오의 아들이며 직업은 세리이다.

(2)이름 개명: 레위(연합하다)_세리 마태(야훼의 선물)

(3)세리 레위의 부모는 아들 레위에게 연합하다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나님과 연합하며 살라고 지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레위는 세상과 연합하며 살았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특별히 많아서 선민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보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는 두 부류가 있었는데, 창녀와 세리이다. 세리는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부당한 방법으로 거두어 돈을 축적했던 사람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세리는 투표권도 없고, 사람으로서 대우도 받지 못했다. 레위는 로마 황제의 창고를 채우는 일과 자신의 창고를 돈으로 채우는 일에 몰두하며 살았다. 레위는 전통적으로 믿었던 야훼신앙, 여호와중심의 신앙을 버리고 살았던 죄인이었다. 조상들이 믿었던 여호와 중심의 신앙도 버리고, 자신의 창고만, 욕심만 채우기 급급했던 현실주의자인 레위를 예수님이 찾아가셨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4)현실의 이야기로 도배된 나의 삶의 자리에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소리가 들려지기를 바란다. 길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우리들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바로 주님의 세미한 목소리가 들리기를 원한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주님의 마음을 느끼기 위해 새벽을 찾고,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의 시간을 드린다. 그 시간이 축적되면 영혼이 맑아지고, 맑은 영혼에 주님의 소리를 더 분명하게 분간하게 된다.

(5)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양은 목자의 소리가 들려져야한다. 이것이 축복이다. 세상에는 선한 목자와 삯군목자가 있다. 양은 선한 목자의 소리를 듣고 따르면 풍성한 꼴을 먹고 생명을 보존한다. 선한목자는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그러나 삯군 목자는 양의 피를 빨아먹고 가치가 없으면 버린다. 삯군은 양을 지키지 않고 양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지 않는다.

(6)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축복의 길인가? 누구의 음성을 따를 것인가? 부정적인 음성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천국의 소리, 복음의 소리를 따라 살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의 삶을 갈라놓는 경계선이다.

(7)나의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가? 누구를 따라 살아가는가? 혹시 하나님의 말씀보다 돈의 지배를 받고 살아간다면 말씀을 다시 묵상하면 좋겠다. 물질은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돈이 나의 생각을 지배해서 하나님보다 앞서있다면 보이지 않는 영적 정신적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8)신앙의 길이란 무엇인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는 것이다. 주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먼저이다. 절대적인 헌신과 절대적인 순종만이 필요하다. 다른 것은 중요한 본질이 아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올인하라. 이것이 세속화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길이라 본다.

(9)1세기 전에 편도 선교사들’(one-way missionaries)이라고 불리는 용감한 영혼들이 있었다. 이들은 갔다가 돌아올 왕복배표가 없이, 편도 표만 구하고 선교지로 떠났다. 짐 가방 대신에 개인물품만 관에 챙겨 넣었다. 이들은 항구에서 가족들과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을 하고 떠날 때,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 선교사들 중에 밀른(A.W.Milne)은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원주민들에게 파송되었다. 그런데, 이곳에 먼저 온 선교사들이 모두 살해당했다. 그렇지만 그런 것에 관계없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선교지에 갔다. 선교사님은 자신은 이미 죽었기에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35년 동안 원주민을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원주민들은 그를 마을 한 가운데 묻고 묘비에 이렇게 비문을 적었다.

그가 왔을 때 빛이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때 어둠이 없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적으로 철두철미하게 하는 것이 비정상인 것처럼 믿기 시작했다. 적당하게 삶의 안정을 누리고 사는 것이 신실하고 균형감각 있는 신앙의 선택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쳐준 진리도 표준도 아니다. 세상의 편리함, 안정감은 사단이 던져준 영혼의 누룩이다.

(10)대충, 적당히, 누릴 것 다 누리고, 먹을 것 다 먹고, 쉴 것 다 쉬고, 하는 분들은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그냥 적당히 살다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평범한 것보다 못한 삶으로 이어진다. 우리에게 친근감으로 다가오는 신앙의 적당함, 균형감각, 대충이라는 단어를 버려야 한다. 무조건 주님이 원하시면 모든 것을 버리고, 드리고, 헌신하고, 순종하는 절대적인 길을 선택할 때 주님의 나라가 주님의 뜻이 비전이 세워진다.

(11)덴마크의 철학자며 신학자인 키르케고르는 권태가 모든 악의 뿌리라고 했다. 권태는 단순한 지루함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고백하면서 권태를 느낀다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올인의 저자가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면 우리의 삶은 결코 지루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헌신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권태를 선택할 것인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자신을 전부 그리스도에게 바치지 아니하면 인생이 지루할 것이고, 바치면 결코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으면 반드시 번성하고, 부흥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을 걸지 않고 살면 반드시 실패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

(12)우리들의 인생에 최대의 기쁨과 순간이 언제였는가? 분명한 사실은 모든 것을 걸었을 때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받쳤을 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블레셋 군대와 싸우려고 가파른 벼랑을 타고 올라갔을 때(삼상14:4),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바다에 자신의 몸을 던졌을 때(15:28-29), 에스더는 민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3일간 금식하며 왕 앞에 나갔을 때일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기쁨을 느꼈을 때가 언제였으며, 무슨 일을 통해 그런 큰 기쁨을 얻었는지 지나온 나날을 돌아보면 금방 안다.

(13)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기준은 어떤가? 제자들은 부르심 앞에서 전부를 걸었다. 마태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일어나 따랐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은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었다.

(14)마태는 인생의 길을 찾지 못해 방황했다. 그가 자신의 방황을 끝내게 해준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열었다. 나의 작은 소원이 있다면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여는 가정을 꿈꿔본다. 예수님을 항상 앞세우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예수님을 항상 존중하는 그런 가정, 일터가 될 때 그 곳에서는 천국의 씨앗이 자라게 된다.

(15)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벌인 곳에 세리와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다. 왜 마태는 많은 분들을 초청했을까? 나는 더 이상 세리로 살지 않겠다는 고백과 결단을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죄인으로 살지 않겠다는 고백의 자리 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세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는 헌신을 선포하는 자리이다.

(16)실패자에서 성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결단이 필요하다. 적당주의와 싸우라. 과거를 깨끗하게 정리하라.

(16)종교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는 예수님을 비방했다. 종교인들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병든 자를 치료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동에서 천국의 본질을 찾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나보다 낳은 사람들과 식사를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상처로 얼룩지고 사람취급 받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한다. 우리가 해야 될 사명이다. 일주일에 한 명씩 정해놓고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다면 전화를 하고 함께 차를 마시고 식사를 나누는 마음을 가져보면 어떻겠는가?

(17)죄인이며 실패자의 삶을 살았던 마태는 예수를 만나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신약성경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가 되었다. 죄인도 실패한 인생도 주님과 함께 하면 성공한 인생이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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