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330)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42)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KC대 전 총장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제울레 아도나이)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게알람 미야드 짜르)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우메아라쪼트-미밈제라흐 우미맘아라브 미짜폰 우미얌) 모으셨도다(키베짬)”(107:2-3).

가을의 문턱에 도달했는데도 태풍이 올라오면서 연일 비가 내린다. 한 여름 무더위로 말미암아 열기가 높아졌던 것을 식혀주려고 있다. 자연은 한반도에 비를 뿌렸고 가을 들녘은 풍년을 기다리고 있다. 선교사들의 복음의 빛을 비쳐서 한국은 잘 사는 나라로 변모하였고, 이제 세계를 이끌어가는 선진국으로 바뀌었다. 오늘 시편 107편은 시편 5권의 세계(107-150)를 여는 첫 시편이다. 5권은 할렐루야 시편으로서 감사하다(야다)’찬양하다(할랄)’라는 말을 기본틀로 삼아서 구성된 찬양의 시모음집이다. 처음과 끝부분에 찬양하라(할렐루야)’라는 말로 시작하거나 끝을 맺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찬양을 받기 위해 창조하였기에(43:21),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찬양하는 인생이 되려고 애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호두 라아도나이)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키 토브 키 레올람 하세도)”(107: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하세도 웨니프레오타이오 리브네 아담) 그를 찬송할지로다(요두 라아도나이)”(107:15). 감사하고 찬양할 이유가 있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그의 기적을 행하심에 대하여 이처럼 반응하게 된다. 시편의 주류는 바벨론 포로 생활하는 백성들이 구원의 사건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분위기이다.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키 쉬바르 다레토트 네호세트)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우베리헤 바르젤 게데아)”(107:16).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야셈 네하로트 레미드바르)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우모짜에 마임 레찌마온)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고(에레츠 페리 리메레하 메라아트) 주린 자들로 거기에 살게 하사(요쉐베 바흐)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와에코네누 이르 모샤브)”(107:33-36). “다시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통하여(메오쩨르 라아 웨야곤) 그들의 수를 줄이시며 낮추시는도다(와이메아투 와야쇼후) 여호와께서 고관들에게는 능욕을 쏟아 부으시고(쇼페크 부즈 알 네디빔) 길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나(와야트엠 베토후 로 다레크)”(107:39-40). 시인은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보며 감사 찬양하고 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인생의 사건과 나라의 비운의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이 일일이 개입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임을 시인은 고백한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나프샴 베라아)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와이쩨아쿠 엘 아도나이)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야켐 세아라 리데마마)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와예헤슈 가레헴)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와이세메후 키 이쉬토쿠)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와야안헴 엘 메호즈 헤페짬)”(107:26-30).

시편 107편은 할렐루야 시편(146-150)으로 가는 첫 관문을 여는 시편으로서 새 역사의 현장에서 듣는 옛 말씀의 형태를 띠고 신뢰시편(108=57, 60)과 메시아 시편(110=2), 제왕 시편(144=8, 18)등의 시편 주제를 되뇌이고 있다. 이 시편은 다윗의 토라’, ‘다시 듣는 토라의 내용을 듣고 보면서 말씀의 세계, 지혜의 세계를 강조한다. “지혜 있는 자들은(미 하캄)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고(웨이쉬마르 엘레)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웨이트보레누 하세데 아도나이)”(107:43). 이스라엘 백성 중에 특히 궁핍한자정직한 자가 구원을 받게 됨을 결론에서 밝히고 있다.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이르우 예샤림 웨이쉬마후)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웨콜 아웨라 콰페짜 피하)”(107:42).

특히 하나님이 행하신 구속행위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이 시편에서 말하며 그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이스라엘이 찬송하라고 한다(8, 15, 21,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요두 라아도나이 하세도 웨니펠레오타이오 리브네 아담)”(107:31). 4번이나 똑같이 반복하며 역사 속에서 기적으로 인도하심의 역사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강조한다. 출애굽의 역사에서 광야에서 방랑하던 사건과 가나안 정착(4-7), 가나안 정복 사건(10-22)을 통해 역사적 회고를 하며 감사로 나가는 시인의 모습을 노래한다. “감사제를 드리며(위제베후 지브헤 토다)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위사페루 마아세우 베린나)”(107:22).

출애굽과 출바벨론의 모티브를 큰 물과 깊은 바다, 광풍등의 혼돈의 세력을 통해 말하며 거기서 벗어나 하나님이 우리를 평온케 하는 항구로 인도함을 말한다(23-32).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야이쉬메후 키 이쉬토쿠)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메호즈 헤페짬)로 인도하시는도다”(107:30). 이러한 기적의 역사는 강이 광야가 되고 샘이 마른 땅이 되는 것과 옥토가 염전이 되고 광야가 못이 되고 마른 땅이 샘이 되는 역사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기이하게 펼쳐지게 됨을 말한다(33-40).

오늘의 우리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기적과 경이로운 일들은 믿는 사람을 통해서 이뤄진다. 선교사들에게는 이러한 기적이 자연적인 일처럼 삶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화성 향남 제암리 3.1운동의 독립 선교를 이끈 석호필 선교사(Frank William Schofield)는 제암리 만세 사건을 세계에 알렸다. 일제 강점기 때 화성 주민 2천 명이 장안면과 우정면 31km에 이르는 만세 행군을 펼쳤다. 이때 조선인이 일본 순사를 처단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육군 보병 79편대를 파견해서 제암리 주민 20여 명을 교회에 가두고 총살한 뒤에 불 질렀다. 그리고 사건의 주모자로 김흥렬을 몰아 일가족 6명을 난도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실을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의 보고서와 임시 정부 파리 위원회에 발간한 책자를 통해 국제 사회에 알려지면서 일본의 무단 통치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감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항일 투쟁이 더욱 가열되게 되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석호필 박사는 영국 태생이지만 1907년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수의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된다. 그는 자유와 독립, 정의와 평화의 3.1운동 정신 바로 그 자체의 선교적 삶을 보여주었다. 석호필(石虎弼), 그의 이름에는 돌보다 단단한 호랑이의 베풂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의 다짐처럼 강하고 굳센 호랑이의 마음으로 한국인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라는 약속이 그의 이름에 담겨있다. 그가 1916년 입국해서 세브란스 의전에서 교수와 선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19193.1운동이 일어나서, 그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제암리 학살 사건을 사진에 담아 알제 학살을 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그의 선지자적 의분은 한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역사를 거슬리는 일제 만행을 알렸고 한국의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있는 나라로 만들려는 염원이 석호필 박사의 꿈꾼 한국이었다. 그는 독립운동, 3.1운동의 34번째 민족 대표로서 우리는 스코필드 박사의 헌신을 잊을 수 없다.

1958년 국빈 자격으로 한국을 다시 찾은 석호필 박사.
1958년 국빈 자격으로 한국을 다시 찾은 석호필 박사.

광복 후 한국에 들어와 1970년 소천 할 때까지 서울대 수의과 대학에서 외래 교수로 근무하며 고아와 어려운 학생들을 돌봤으며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제암리 사건의 현장에 찾아가서 제암리의 참상을 사진을 찍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록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전 세계에 알려 이 학살 사건이 비폭력 평화 운동, 만세 운동이 시작되는 기폭점이 되었다. 이 사건의 가해자, 지휘 책임자인 아리타 중위에 대한 처벌이 없었다. 이는 형식적으로 절차만 있었을 뿐 전혀 처벌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기적이 연속되었지만 결국 석호필 박사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된 후 1958년 다시 돌아와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며 고아와 어려운 학생을 도우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국립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힌 유일한 외국인으로서 안장되어 있다. 이처럼 선교는 선교지의 백성의 마음과 뜻과 생각을 가지고 혼혈일체가 되는 것이다. 석호필 선교사는 그렇게 선교지를 완전히 품고 한국민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선교사와 한민족에게는 선교의 기적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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