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출간, 교보서점 및 인터넷서점 구입 가능

광주제일교회를 집사ㆍ장로ㆍ목사로 섬긴 오방 최흥종

최흥종[崔興琮, 본명은 최영종(崔永琮)]은 조선 후기인 1880년(고종 17년) 5월 2일 전라도(全羅道) 광주목(光州牧) 부동방면(不動坊面) 서문외(西問外) 지역(현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행정동 삼성동)에서 최학신(崔學新)과 국(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4세(1884년) 때 어머니 국씨가 별세하므로 어린 시절을 외롭게 보냈고, 1897년(17세)에 강명환과 혼인하였으며, 18세(1898년) 때 아버지 최학신마저 별세하므로 가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고아(孤兒)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 둘 곳이 없게 되므로 인해 광주의 ‘무법자(無法者)’요 광주 일대의 건달들을 데리고 다니는 깡패 보스로 알려질 정도로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광주의 무쇠 주먹으로 소문난 최흥종은 언제 개종하여 광주교회의 신자가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세 가지 견해가 있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차종순 박사의 견해이다. 1904년 12월 25일(주일) 양림리교회(현 기장 양림교회)의 최초예배시간에 참석한 젊은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최흥종, 배경수, 최재익’으로 알려졌다고 하면서 이때부터 최흥종이 양림리교회 신자가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견해는 지금까지 상당수의 연구자가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차종순이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 자료로 제시한 것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8)의 기록이다.

광주군 양림리교회가 성립하다. 초에 선교사 배유지, 오기원이 조사 변창연과 교우 김윤수를 동반하여 목포로부터 본 리에 도착하여 사택을 정하고 열심 전도한 결과로 최흥종, 배경수 등이 신종하여 자기 사랑에서 예배하다가 신도가 점차증가됨으로 북문내에 와가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둘째, 김수진 박사의 견해이다. 남장로교회 광주 선교부 건물 건축을 훼방하려고 건축현장에 최재익과 함께 찾아온 최흥종을 만났던 건축책임자 김윤수의 전도와 광주 선교부 대표이며 광주교회 설립자인 유진 벨 선교사와 광주 제중원(濟衆院, 현 광주기독병원) 제2대 원장 윌슨(Robert Manton Wilson, 1880.∼1963. 禹越遜) 선교사의 권면으로 1907년 개종하여 광주교회 신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1907년 전국적인 성령운동이 일고 있을 무렵 뜻하지 않게 그(발제자 주, 최흥종)에게도 인생의 전환점이 왔다. 이미 김윤수 집사의 전도를 수차례 받기는 하였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배유지(유진 벨) 선교사와 윌슨 선교사의 간곡한 부탁으로 개종을 하였다.

위 두 견해는 각각(各各)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차종순이 제시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를 보면 ‘본 리에 도착하여 사택을 정하고 열심 전도한 결과로 최흥종, 배경수 등이 신종(信從)하여 자기 사랑에서 예배하다가’라고 하였다. 이는 ‘유진 벨과 오웬 선교사가 양림리에 도착한 후 최흥종, 배경수 등을 전도하여 유진 벨의 사랑에서 예배를 드리므로 양림리교회가 설립되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양림리교회 설립 당시의 기록이라고 차종순이 또 제시한 유진 벨 부인의 기고문 중 ‘두 방으로 인도되어 들어간 숫자를 남녀 각각 20명으로 추산을 한 후 남자 20명 중에 ‘최흥종, 배경수, 최재익’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유진 벨과 오웬이 ‘최흥종, 배경수, 최재익’을 전도하여 그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사실이라면 벨 부인이 이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견해는 억지로 맞추려는 의도가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광주로 온 이후... 첫 번째 주일은 크리스마스 날이었으며... 11시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 집 쪽으로 줄지어서 오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임시 거처는 방 사이에 미닫이문이 있는 두 개의 큰방이 있었기에... 여자들과 남자들을 각각 다른 방으로 인도하였으며, 벨 목사는 문에 선체로 ‘땅에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은혜’라는 주제로 말씀을 강론했다. 우리는 그날 200여 명의 불신자가 최초로 진리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김수진은 ‘최흥종이 1907년에 개종했다.’라고 하면서도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 자료에 대하여 언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더구나 1908년에 내한하여 광주 제중원 제2대 원장에 취임하여 의료선교사역을 시작한 윌슨이 어떻게 내한 1년 전인 1907년에 최흥종을 만날 수 있으며 그가 개종하도록 노력할 수 있었다고 했는지 의아(疑訝)한 생각이 든다. 혹 김수진은 최흥종의 개종을 1907년이 아닌 1908년으로 보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수진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한 견해라고 여겨진다.

셋째, 발제자의 견해이다. 최흥종이 1919년 삼일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구금상태에서 그해 6월 25일(수) 경성지방법원에서 신문조서(訊問調書)를 받을 때 개종 시기와 출석 교파를 묻는 판사의 질문에 ‘1906년에 장로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다고 대답하였으며, ‘전도사가 된 시기는 1915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최흥종은 1906년에 김윤수와 유진 벨의 노력으로 개종하여 광주교회 신자가 되었다.’라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 성명·연령·신분·직업·주소·본적지 및 출생지를 말하라

답 성명은 崔興琮. 연령은 39세, 5월 2일생...

문 야소교의 무슨 파인가.

답 장로파이다.

문 13년 전(발제자 주, 1906년)에 장로파를 신앙하고 4년 전(1915년)에 전도사가 되었는가.

답 그렇다.

1906년 광주교회 신자가 된 최흥종은 1908년 3월 광주 제중원 윌슨의 어학 선생 겸 조수(助手)로 취직하여 근무하던 중 1909년 4월 3일(토) 나병(癩病, Hansen病)으로 죽어가는 여인에게 친절과 헌신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 1873.∼1918. 보의사) 선교사의 모습에서 예수와 이웃과 조국을 발견하고 목자(牧者)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한다. 이어 광주 나병원(한센병원) 건립을 위해 1,000평의 땅을 기증하고 윌슨의 추천으로 병원 책임자가 되어 봉사하기도 하였고, 이 일을 시작으로 최흥종은 평생을 나병 환자들의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았는데, 1912년 8월에는 김윤수와 함께 북문안교회 장로로 임직을 받았다. 그리고 1914년 8월 15일(토) 제4회 전라노회에서 신학교 지원을 허락받았고 9월에는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였으며, 1917년 1월 31일(수) 북문안교회에서 설립한 북문밖 기도처의 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하므로 목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부터 1934년 서서평 선교사 별세 시기까지 최흥종의 여러 가지 방면에서 활동했던 일들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방 최흥종은 1920년 7월 광주 YMCA를 설립하였고, 8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광주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1월 미국교회에 청년운동 지원요청을 위한 공개서한을 보냈다. 1921년 1월 28일(금)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북문밖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였고, 6월 전남노회 부노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북문밖교회에 광주유치원을 설립하였고, 모루히네 방독회를 조직하여 마약퇴치운동에 앞장섰으며, 8월 광주부인회(회장 홍선경)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9월 광주청년회(光州靑年會) 의사회 의사장에 추대되었으며, 10월 북문밖교회에 광주여자야학을 설립하였다. 1922년 1월 금정교회 유치원 설립기금 모금 가극대회를 개최하였고, 3월 서백리아(현 러시아) 선교사로 파송되었으며, 1923년 8월 광주서선구제회(수재민 돕기운동)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9월 광주군 소작인 연합회(光州小作人聯合會) 대표로 추대되었다.

오방 최흥종은 1924년 7월 전남노회장에 선출되었고, 9월 금정교회 제5대 담임 목사로 취임하였으며, 1926년 2월 광주 나병원을 여수로 이전할 때 금정교회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적극 헌신하였고, 6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전남여고) 설립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0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 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28년 8월 광주교육보급회 이사장에 선출되었으며, 광주철도 기성위원회 특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9년 1월 제주 모슬포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1931년 9월 조선나병환자구제회(朝鮮癩病患者救濟會)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2월 총독부에 나병환자들을 위해 ‘소록도 확장, 수용인원 증원, 치료예산 증액’을 건의하여 반영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오방 최흥종은 1932년 6월 경성에 있는 나병환자 30명을 전용칸 기차를 이용하여 여수병원에 입원을 시켰고, 8월 궁민구제연구회(철거민 대책연구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1월 조선총독부가 최흥종과의 약속을 지켜 재단법인 조선나병예방협회를 조직하고 관(官) 주도 나병 환자 활동을 시작하였고, 12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정무총감(政務總監)이 최흥종의 활동을 치하하며 협조를 요청하였다. 1933년 3월 계유구락부(癸酉俱樂部)를 설립하였고, 1934년 서서평 선교사 추도대회 준비위원 등 많은 활동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최흥종 목사는 깡패 보스로 광주를 주름잡던 건달이었으나 남장로교회 광주 선교부 대표 유진벨 선교사와 선교부 건물 건축책임자 김윤수를 만난 인연으로 인해 광주교회 신자가 되었다. 그가 광주 제중원에서 윌슨 원장의 조수로 근무하던 어느 날 목포 선교부 소속 포사이드라는 의료선교사가 나병으로 죽어가는 여인을 예수처럼 섬기며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 예수를 만났고, 이웃과 민족을 재발견하였다. 그리고 ‘헐벗고 굶주리며,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족의 목자로 평생을 살겠다’라고 결심하고 실천하였던 그는 교회와 사회를 하나로 보았으며 사회구성원인 민중들을 사랑하는 것이 곧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목사이면서도 노동운동, 청년운동, 교육운동, 마약퇴치운동, 빈민구제운동, 신간회활동 등을 했으며, 목회자들이 세속의 길을 가고 있을지라도 민중인 청년이 깨어 일어나면 교회가 변하고 조국이 독립할 수 있다고 믿고 초교파 청년운동 단체인 광주 YMCA의 지도자로 평생을 살았다.

특히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신행일치의 삶’이라고 주장하며 전 생애를 나병 환자들의 보호자요 대변자인 아버지로 살았다. 그래서 그는 자녀들로부터는 가족을 버린 매정한 아버지로 존경을 받지 못했지만, 나병 환자들로부터는 인자한 아버지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기에 그는 재산을 나병 환자들을 위해 내놓고 서로 의지하며 치료받을 수 있는 공동체인 광주 나병원을 설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나아가 이 병원을 총독부의 요청으로 여수 애양원으로 이전하는 일에도 앞장을 섰으며, 나병 환자들을 위한 단체들을 조직하여 그들이 대접받으며 살 수 있도록 대변자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에 건의하여 전국에 흩어져서 소외당하고 있는 나병 환자들을 소록도로 집단 이주토록 공헌하였으며 음성 나병 환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호혜원’이라는 이상촌 공동체를 조성하여 선물하였다. 그러기에 전국의 나병 환자들로부터 시작하여 광주의 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아버지와 성자로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윗글은 12차 서서평연구회에서 서재룡 교수가 발제한 "광주제일교회 초기역사와 인물들 (1904∼1934) - 최흥종, 강순명, 서서평 -" 원고 중 최흥종 목사에 관련된 부분을 발췌했다. 참고로 최흥종 목사의 마지막 목회지는 "광주중앙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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