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주는 전 지구적 현상으로 현대는 ‘이주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이주의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 한국처럼 송출국이었던 나라가 이민자를 수용하는 유입국이 되기도 하고 이주의 배경이나 동기, 특성, 인적자원 등도 다양해졌다. 이주는 단지 모국을 떠나 거주국에 한 번에 정착하는 단선적이고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기회를 찾아 연속적으로 이주하면서 여러 나라에서 정착과 재정착이 반복되고 있다.
해외이주역사의 네 번째 시기는 한국 정부가 처음으로 해외이주법을 제정한 1962년부터 현재까지인데, 이때부터 정착을 목적으로 한 해외이주가 시작되었다. 1962년 이민정책의 근본 목적은 잉여인구를 외국으로 내보내 인구압력을 줄이고 해외동포들이 송금하는 외화를 벌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일본, 독립국가연합(CIS)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 이민자와 그 후손이 이 시기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1962년 한국 정부는 남미, 서유럽, 중동, 북미로 집단이민과 계약이민을 시작했는데 최초의 공식 집단이민은 1963년 브라질의 산토스 항에 도착한 103명의 집단영농이민자였다.
이후 1963~66년까지 5차례에 걸쳐 1300여 명의 농업이민자가 브라질로 이주하였다. 당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경영한다는 명목으로 중남미국가들로부터 초청을 받아갔지만, 이민자 대부분은 농업에 대한 정보나 경험, 기술이 부족했고 한국과 다른 기후와 풍토병으로 인한 질병과 사망 등 열악한 농촌환경과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리하여 이민자들은 영농을 뒤로한 채 날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거나 다른 대도시로 재이주하여 피난민 같은 생활을 하며 상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재외동포들은 의류업을 중심으로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주류사회에 편입, 흡수되거나 일부는 북미나 다른 지역으로 재이주하여 정착하기도 하였다.
2014년에 개봉되어 흥행한 영화 ‘국제시장’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한 줄거리와 함께 이 시기 국제이주의 몇몇 흐름을 보여준다.
유럽으로의 이주는 한국전쟁 후 전쟁고아의 입양, 파독 광부와 여성 간호사, 유학생과 상사주재원의 이주 등 시기별로 다양한 흐름으로 이루어졌으며 역사도 짧고 재외동포의 수도 적으며 단기체류자의 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1963~77년까지 서독에는 광부들과 여성 간호사들이 계약노동자의 신분으로 이주하였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보듯이, 광부들은 광산에서 갱도 속으로 내려갈 때 매번 ‘살아서 보자’라고 말할 만큼 힘든 노동의 시간을 보냈고 간호사들은 병원 청소나 시체 닦이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 그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그들이 송금한 외화는 한국경제개발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국제결혼으로 정착한 이민자들은 1971~72년에 이주한 300여 명의 조선 기술자와 함께 초청노동자에서 독일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면서 한인사회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이후 유학생, 주재원 등을 중심으로 유럽의 이민 사회를 형성해 나갔다. 1980년대까지는 재외동포가 독일에 가장 많았으나 1990년대부터는 영국이 유럽 한인사회의 중심이 되었고 현재는 다양한 분야의 재외동포들이 유럽 전 지역에 산재해 있다.
이 시기 북미로의 이주는 1960년대 중반 미국과 캐나다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고등교육을 받고 사무직에 종사했던 중산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가족초청이민 형태로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경제의 성장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이출 및 이주가 감소하면서 오히려 역이민이 증가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다시 해외이주가 증가했는데 주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의 이주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때는 가족초청이주보다 사업이주, 취업이주가 증가하였다. 특히 한국의 외환위기는 국내 고용불안정을 심화시켜 고용에 불안을 느낀 30대에게 해외이민의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취업이민자의 대다수가 30대였으며 고학력, 전문기술직 종사자를 우대했던 캐나다의 이민정책과 맞물려 이들에겐 미국 대신 캐나다가 이주의 새로운 목적지가 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엔 북미의 주요 이주집단은 주로 조기 유학생과 언어연수생이었다. 1994년 한국과 입국사증면제를 실행한 캐나다는 많은 수의 유학생을 유치했다. 미국 역시 2008년부터 한국과 입국사증면제 프로그램을 시행하여 한국 유학생의 이주를 촉진시켰다. 단기 교육목적으로 체류했던 이들은 이후 취업이나 결혼 등을 통해 영주권을 취득하여 현재 한인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편입되고 있다.
한편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지속된 베트남전쟁은 기술자들이 베트남으로 파견되는 계기가 되었고, 종전 이후 이들은 중동, 동남아시아, 호주 등으로 재이주하여 동남아시아 한인사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특히 1970~1980년대에 건설 붐이 일었던 중동으로의 노동 이주는 국내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외화획득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후 건설노동자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다른 국가들로 재이주를 하였다.
당시 호주로의 이주는 1960~1980년대에 독일, 베트남, 중동 등에 계약노동자의 신분으로 이주했던 한인들의 재이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60~70년대 호주의 광산 붐으로 한인이 대거 호주로 이주했고 1972~75년에는 500여 명의 기술자, 취업자가 호주로 이주했다. 이런 붐은 이란,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에 있던 재외동포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호주로 끌어들이는 원인이 되었다. 1980년 6월에는 호주 정부가 불법체류자에 대한 제2차 사면령을 내리면서 한인 불법체류자들의 합법적인 정착이 가능해져 고국의 가족들과 재결합하면서 호주의 한인사회는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호주로의 이주는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배경과 동기를 가진 한인들에 의해 전개되어 왔다.
1990년 한소수교와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는 구소련과 중국의 동포들이 재외동포로 재편입되면서 1990년 재외동포의 수는 232만여 명에서 1995년에는 554만여 명으로 급증하게 되었다. 해외이주 첫 번째 시기부터 꾸준히 이주의 역사를 써 온 이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각기 상이한 방식으로 거주국에 편입되었고 시기마다 이들이 직면한 사회문제의 양상도 사뭇 달라지고 있다.
현재 재중동포는 중국의 경제개혁 과정에서 소외됨으로써 실업과 빈곤의 문제, 출산율 감소와 국내외 인구 이동으로 인한 인구감소와 쇠퇴 등을 겪고 있다. 동북 3성 연변 자치주의 인구감소는 인재유출, 민족교육 수준 저하, 한족 인구 증가로 인한 한족화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그럼에도 베이징, 선양, 상하이 칭다오 등의 대도시로 이주한 재중동포들은 상업, 서비스, 생산직 등에 종사하면서 활발한 도시 동족 공동체를 형성해가고 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등에 거주하고 있는 재외동포들은 구소련의 체제 붕괴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으며 1991년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 이후엔 민족주의로 인한 차별, 민족어 상실, 민족문화의 상실과 같은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연해주와 볼고그라드 지역으로 이주한 동포들은 직업, 주택, 소득, 교육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시기 재일동포는 여전히 일본인과의 차별 속에서 2,3세들의 일본인과의 결혼으로 인한 귀화, 민족교육의 약화로 일본 사회에 급속히 동화되어 가고 있다. 반면 1989년 한국의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도일(渡日)한 한인들은 뉴커머(New comer)라 불리며 올드커머(Old comer)와는 다른 직업, 생활양식, 정체성 등으로 재일동포 사회에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 해외이주의 궤적을 살펴보았다.
세계이주역사에서 이렇게도 힘들고 처절한 고난 끝에 승리를 이끌어낸 이주역사를 가진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150여 년 동안 전 세계에 뿌리내린 우리의 해외 이주역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공간을 삶의 중심으로 보기에 일상에서 타자(他者)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나와 다른 문화나 가치를 소유한 경우엔 서로가 여러 가지 심리적 갈등이나 문제들을 겪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에겐 진정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우리는 단지 삶 속에서 경험의 차이로 서로 다른 시각을 가졌을 뿐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니다. 나의 위치가 아닌 타인의 위치에서 타인을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야말로 '이주의 시대'에 꼭 필요한 시대정신이 아닐까.
이주의 시대 필요한 정신
역지사지
이민 가는 한국인, 이민 오는 외국인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다. 이주의 역사 속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이 땅에 머물고 있는 이주민 역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우리의 이웃들이다. 이제 그들도 이곳에서 복음을 듣고 믿으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성취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위기 19장 18절 말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