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우레쇼니 테헤게 찌드케카)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시35:28).
세상은 고물가, 고유가, 고환율, 3고로 물가가 오르고 경기는 침체되어 서민 경제가 어렵고 힘들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주위에 사업하는 분들이 이구 동성으로 어렵다고 한다. 일본처럼 주택 경기와 부동산 거품이 빠지는 상태가 되고 건축자재가 높아져서 건축하기에 힘들고 경제가 나쁘다고 한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진행되면서 한국 교육환경이나 현실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가며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리라.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레다위드 리바 아도나이 에트 예리바이 레함 에트 로하마이)”(시35:1). 시편 35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 되어서 대적자와 싸워달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같이 삶의 전쟁터에서 싸워달라고 시인은 간구한다.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레하레크 하니트 우세고르 리케라트 로드파이)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시35:3).
시편 35편은 개인 탄식시편으로서 근심이나 곤궁할 때에 성전에 기도하러 갔던 개인에 의해 작시되었다. 이 탄식시의 구조는 하나님을 부르짓지만 현실이 어려워 불평하며 고백하는 기도와 신뢰의 고백, 구원을 위한 탄원, 구원의 신탁, 시인이 찬양하겠다는 서약으로 찬양시와 송영으로 끝난다. 이 탄식시편은 대적자의 문제를 말하며 이스라엘 공동체 안의 싸움을 보이며 이 시편 중 ‘비난당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법적인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성전에서 노래가 불리게 되었다(시7, 35, 57, 69편). 이 시편은 저주(imprecatory, cursing)시편으로서 시편 59, 69, 70, 109, 137, 140편 등이 이에 해당하고 공동체 탄식시는 시편 12, 58, 83편이 해당한다. “내 생명을 찾는 자들이 부끄러워 수치를 당하게 하시며(예보슈 웨이카레무 메바크쉐 나프쉬)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들이 물러가 낭패를 당하게 하소서”(시35:4). “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시며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테보에후 쇼아 로 예다 웨리쉐토 아쉐르 타만 티레케도 베쇼아 이팔 바흐)”(시35:8).
시편 35편은 개인 탄식시편이지만 실제에서는 국가적(회중적)시편의 성격을 띤다. 시편 9-10; 13; 31; 35; 42-43; 55; 56; 69; 94; 102; 109; 142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대적자의 공격과 위협으로 불평하거나 탄식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이쿠문 에데 하마스 아쉐르 로 야다티 이스아루니) 내게 선을 악으로 같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시35:11-12). “그들은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들의 이를 갈도다(베하테페 라아게 마오그 하로크 알라이 쉬네모) 부당하게... 나의 원수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나의 재난을 기뻐하는 자들이 함께 부끄러워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스스로 뽐내는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하소서(예보슈 웨아흐페루 아흐다오 쉐메헤이 라아티 이레베슈 보쉐트 우케리마 하마게디림 알라이)”(시35:16, 19, 26). 일인칭 개인 탄식의 국가 시편인 시편 35편은 악한 혀와 말, 거짓된 비난과 허위로 송사, 고소를 하는 것을 시인은 탄원한다. “무릇 그들은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평안히 땅에 사는 자들을 거짓말로 모략하며(키 로 샬롬 에다베루 웨알 리게에 에레츠 디베레 미르모트 야하쇼분) 또 그들이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격하였다 하나이다”(시35:20, 21). 점치는 자들의 마술적 언급도 말한다(시35:11).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하이라 웨하키짜 레미쉬파티 엘로하이 와아도나이 레리비)”(시35:23). 악한 저주와 영혼의 손상과 귀신적인 상해의 말이나 비웃음, 조롱과 비방으로 말미암아 시인을 어렵게 한다.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우베짜레이 사메후 웨네에사푸 네에세푸 알라이 니킴 웨로 야다티 카르우 웨로 담무)”(시35:17). 이러한 불의하고 사악한 대적자들의 이유없는 공격에도 시인은 결국 감사하고 즐거워하면서 찬양함으로써 끝난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우레쇼니 테헤게 찌드케카 콜 하욤 테힐라테카”(시35:27-28). 항구적인 약속으로 예언적 시의 성격을 가진 시편 35:3절은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라고 말한다. 또한 이들은 ‘평안히 땅에 사는 자들’로서 경건한 자이나, 이들은 이웃의 압제자들과 평안히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며 그 회중을 말한다.
“무릇 그들은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평안히 땅에 사는 자들을 거짓말로 모략하며 또 그들이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격하였다 하나이다”(시35:20-21). 참으로 소문으로 사람을 괴롭게 한다. 곧 확증편향과 가스등 효과(gaslighting)를 통해 상대를 정신병적 상태로 몰고 가서 시인이나 의인을 의심과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하여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모습이, 이 시편 35편의 대적자에게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의인은 결국 감사하며 찬송하게 된다.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오드카 베카할 라브 베암 아쭘 아할렐카)”(시35:18).
이러한 탄식 속에도 감사와 찬양을 잊지 않았던 인물이 있다.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 1873-1911)선교사는 미국 켄터키 주 해로스버그에서 태워나서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선교의 뜻을 두고 1898년 루이빌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턴 과정을 마친 후 쿠바에서 벌어진 미국과 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포사이드는 1904년 8월 10일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그는 전북 전주에서 순회 진료를 하며 고아원을 운영했다. 그는 1905년 어느 날 망골(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했던 말목 장터 근방 마을)에서 강도의 습격을 당해 부상자를 치료해 달라는 간청을 받고 바로 간다. 거기서 부상자를 치료해 주고 밤이 늦어 그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날 밤 포사이드 선교사는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다. 귀가 잘리고 두개골이 깨지고 얼굴과 목에 큰 상처를 입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 착한 사람들이 그를 조심스럽게 전주로 데려고 와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귀와 머리의 상처가 깊어서 미국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고, 2년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후에는 목포에서 의료 선교를 하게 된다.
선교사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며 고독과 끊임없는 자신의 욕망과의 싸움이다. 땅에서 살지만 선교사는 하늘에 머리를 두고 하늘 천국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짧은 사역을 하였지만(1904-1911) 그의 사역은 헌신적이었다. 특히 그는 이보한과 최흥종을 전도하고 회개하는 사건을 가지게 하였다. 포사이드 의료 선교사로서 다니엘, 조셉 놀란 선교사와 함께 내한하여 전주에서 선교사역을 하다가 괴한에게 칼을 맞기도 하며 고난을 받았지만 다시 1909년 한국에 돌아와 사역을 의연하게 행한다. 그는 1909년 4월 급성 폐렴에 걸린 오웬 선교사를 치료하기 위해 광주에 가는 길목에서 신음하고 있는 나병환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신의 말에 태워서그를 광주기독 병원인 제중원에 데리고 극진히 치료해주었다. 그 후 그는 스프루라는 열대 풍토병에 걸려 1911년 치료차 다시 미국으로 나갔다가 다시 선교지로 돌아오지 못하고 1918년에 소천하게 된다.
포사이드 선교사의 한국 사역은 5년 정도로 짧았지만 그는 두 가지 사건으로 호남 선교의 별이 되었다. 그는 안식년으로 출국한 잉골도 선교사를 대신하여 전주 예수 병원에서 의료 사역을 감당하였고, 또한 전킨 선교사와 함께 거리에서 걸식하는 아동들을 데려다가 보호하는 고아원 사역을 하였다. 논을 경작하여 자립하도록 선교의 발판을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1905년 3월 익산 목천포 당뫼에 사는 양반 가문의 강도당한 환자를 치료해달라는 부름을 받았다. 전주 이씨 양반인 이경호를 치료하다가 그만 경찰로 오인한 강도들이 그를 칼로 마구 찔러 얼굴과 귀, 머리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도망하였던 것이다. 포사이드는 밤새 이 씨 가족의 돌봄으로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군산 다니엘 의사의 응급 처치로 나아져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다가 조금 나아진 다음 미국으로 치료차 갔던 것이다. 나중에 전라 관찰사가 이 사건의 범인을 잡고 그에게 범인의 처벌을 물었을 때, 그는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한다’고 하였다. 그 후에 전주 지역의 양반들이 앞을 다투어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이처럼 짧지 않은 4년의 사역이지만, 예수 사랑의 선교는 조선의 남도의 십자가 사랑과 예수 진리를 퍼뜨리는 놀라운 선교의 기적이 일어나게 하였다. 포사이드 선교사의 깊은 사랑의 발자취는 오늘도 남아서 선교사들의 귀감이요 한국 교회의 등불이 되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