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338)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50)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쉬르 하마아로트)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미마아마큄) 주께 부르짖었나이다”(퀘라티카 아도나이)(130:1).

전쟁의 비극이 저 중동 땅에서 하마스-이스라엘 간에 벌어지고 있고, 또 우크라이나-러시아 간에도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종전 7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한이 삼팔선이 그어져서 전쟁의 위협이 여전히 있는 분단 조국의 상태가 되었다. 언제 통일이 될 수 있는가? 학수고대하는 실향민들의 애환은 오늘의 시편과 같은 애가가 펼쳐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아도나이 쉬메아)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베코리 티헤에나 아제네이카 콰슈보트 레콜 타화누나이)”(130:2). 시편 기자는 존재의 깊은 곳에서’(Out of Depth) 부르짖는 탄식 소리를 하나님께 쏟아놓고 있다. 시편 전체를 한마디로 깊은 곳에서라고 하여 시편 책을 쓴 앤더슨(B. W. Anderson)은 시편의 척추가 탄식시편이라고 보며 1/3이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 개인 탄식 시편은 시편 3-7; 9/10; 13; 17; 22; 25-28; 31; 35; 38-39; 40.13-17=70; 42/43; 51-52; 54-57; 59; 61; 64; 69-71; 77; 86; 88; 94.18-23; 102; 109; 120; 130; 139-143 등이다(존 데이). 왕정 시편 안에서 모빙켈은 130편이 공동체 탄식 시편으로서 I-form(1인칭 관점, 시편 관점)이 나온다고 본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키위티 아도나이)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키웨타 나프쉬 웨리데바로 호하레티)”(130:5). 국가의 왕의 입장에서 시편 130편 기자는 이방인을 적으로 보며 그 대상으로 말미암아 탄식의 노래를 지어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노래를 부른다고 본다(비르켈만).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야헬 이스라엘 엘 아도나이)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키 임 아도나이 하헤세드 웨하르베)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웨하레베 이모 페두트 웨후 이페데 에트 이스라엘 미콜 아오노타이오)”(130:7-8).

130편 시편은 후기 기독교회의 시편으로서 루터와 칼빈이 애송하며 자주 언급한 시편이다. 7개의 참회 시편은 시 6, 32, 38, 51, 102, 130, 143편으로서 메시아 시편이다. 오리겐의 알레고리적 해석은 독특하게 해석되며 시편 37, 46편에서와 같이 우리 주는 강한 요새라고 토마스 칼라일은 해석한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나프쉬 라도나이 미쇼메림)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라보퀘르 쇼메림 라보퀘르)”(130:6). 군대에서 불침번으로 근무를 설 때에 새벽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군대 용어는 바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의 구원과 구속을 간절하게 바라는지 잘 표현해주고 있다. 외국의 적 앞에서 전쟁의 대치 상황을 파수꾼의 긴장과 경계를 잘 보여준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임 아오노트 티쉐마르 야흐 아도나이 미 야아모드) 그러나 사유(용서)하심이 주께 있음을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키 이메카 하세리하 레마안 티와레)”(130:3-4). 고난의 이유가 죄악을 짐으로 말미암아 기원하는 것임을 밝히며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통해 존재함과 전쟁의 승리함이 달려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심이라고 노래한다. 우리 인생의 문제에서 고난과 고통이 어디서 발원하며 우리의 탄식이 존재의 깊음 곳에서외치게 되는 이유를 이 시편 130편의 탄식 시편에서 대표적으로 잘 나타내주고 있다. 우리 시대의 영광의 나라가 된 것은 이전에는 예수 없는 고통의 나라에서 질곡과 고난의 조용한 나라로 부터 죄의 유전이 되뇌이며 나타나게 되었다. 이 때 빛을 가지고 온 선교사들의 거룩한 발걸음이 오늘의 한국, 선진국을 만들게 한 것이다.

평양의 예루살렘은 이제 극서 지역에서 극동 지역으로 옮겨지고 있으며 영적으로 옮겨가는 순교자의 피가 있었다. 27세의 토마스 부부의 순교는 대동강에 성경책을 전해주고 조선 관군에 의해 칼에 찔려 순교 한 것이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 Jermain Thomas, 1839-1866)183997, 영국 웨일스 라야더 회중 교회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시와 음악을 좋아했던 종교성이 풍부한 영혼이 맑은 사람이었다. 아버지 목사는 교회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가르쳤고 런던 선교회에 선교 헌금을 보내었다. 토마스는 언어 재능이 뛰어났고 선교 마인드가 투철하였고 모험심이 좋았다.

토마스는 17세에 하노버 교회에서 첫 설교를 할 정도로 신앙이 성숙했고 노방 전도도 했고 18, 1857년에는 런던 대학교에 입학하여 2년 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최고의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는 중국 선교사 록하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고 선교사로 자원하게 되었다. “여러분 지금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순교하는 신앙이 아니고는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구원에 감사하는 영혼들을 볼 때 저는 선교사로 부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순교하는 신앙으로 세계 곳곳에 나아가 복음 전할 사람들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록하드 선교사)

토마스는 24세에 1863년 캐롤라인 고드프리라는 아름다운 신앙의 여자와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그 해 5월 런던 선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중국행 풀메이스 호에 승선한다. 4개월 반 만의 긴 항해 끝에 그해 12월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토마스 선교사 부부는 선교 사역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며 아침에 일어나면 조랑말을 타는 연습을 하고 8-12시 까지 상하이 방언을 배웠다. 또 오후 3-5시까지는 베이징 방언을 배우고 7-10시까지는 선교 모임을 하는 강행군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지낸 상하이에서의 3개월은 꿈같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쁨과 그 기대는 행복으로 부풀게 하였다. 중국에서 임신 중에 입덧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토마스는 아내 캐롤라인을 위해 좋은 곳을 찾기 위해 홀로 한구라는 곳에 갔고 아내는 홀로 남겨 두었다. 그런데 캐롤라인은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태중이 아기가 유산당하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캐롤라인은 극도의 몸의 수척함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마지막 위로와 사랑의 편지를 남기고 자신은 괜찮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고 마지막 편지를 썼다. 집에 돌아온 토마스는 아내가 유산 후 심한 하혈을 하고 감염되어 죽어간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와 그의 성경책을 받은 박춘권 안주교회 영수(장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와 그의 성경책을 받은 박춘권 안주교회 영수(장로)

그는 너무 실망하고 큰 슬픔에 빠졌지만 하나님의 신앙은 저버리지는 않고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찬양했고 186445일 외국인 묘지에 아내의 시신을 묻었다. 그 때 또 딸의 소식을 들은 장인어른이 그 슬픈 소식에 돌아가셨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토마스에게는 이 삼중의 슬픔과 불행의 비극이 연속되었다. 이로써 토마스는 조선에 가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준비과정이 된다. 이 혹독한 훈련과정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조선 땅의 첫 순교자의 보혈의 피를 흘릴 각오를 하고 제너럴셔먼의 호의 몸을 실고 복음의 십자가를 지고 대동강으로 건너가게 된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힘을 지니게 되고, 슬픔과 아픔과 절망을 경험한 사람은 슬픔과 아픔과 절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힘을 지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김명혁 목사). 토마스는 그렇게 한국의 복음의 문을 열기 위해 조선의 땅에 산제사로서 순교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 반만년의 복음의 문은 이처럼 어렵게 열리고 있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장면(혜촌 김학수 화백 그림)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장면(혜촌 김학수 화백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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